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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스랑 Sep 09. 2023

중앙역

김혜진, 중앙장편 문학상 수상작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다. 중앙역은 장소가 주인공이 되는 소설일까. 이 특별한 장소가 없다면 만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상징이기도 하지만 실제적이다. 중앙역은 뉴욕에도 도쿄에도 파리에도 있다. 서울 곳곳에 있다. 부촌인 강남에도 있다.


인물이 주인공이기도 하다. 왜 1인칭을 썼을까. 독자가 끝내 자신의 일로 생각해 주길 바라서? 모두가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당신들이 날마다 사용하는 그 광장에서 밤에도 낮에도 이 사회에 쓸모없는 사람으로 치부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을 읽는 당신만은 자신의 일로 생각해 달라,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끝내 이름은 없다. 내가 놓친 것일까. <당신의 이름>의 장에서 이름이 나와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내밀 때도 한 번쯤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죽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왜 죽지 않을까? 죽어서는 안 되지.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하니까. 차라리 낯선 동네의 그 남자처럼 보란 듯 옥상에서  새처럼 날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책을 읽으면서 간간히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죽음의 의지가 솟구쳤다. 과거에 대해 한 마디도 뻥끗하지 않는, 현재형의 일인칭은 강렬하다. 외면할 수 없는 내 이야기처럼 감정이 이입된다.


<광장>의 모든 것이 낯설다. 그는 젊지만 광장에서 잠을 청한다. 광장의 주인공이 아니라 광장의 주변인이다. 소음으로 잠을 잘 수 없는 그런 공간에서 시작한 삶이었다. <밤의 수심> 그건 깊이였을까? 아니면 근심이었을까. 어떤 것이 되었든 밤은 내 것을 훔쳤다. 내 캐리어를. 돈이 들어있었고 내 마지막 필수품이 들어있는 그것을 그 여자가 밤을 이용해 훔쳤다. <연인들> 캐리어 대신 사랑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쨌든 연인들이라고 속닥거려도 될 만큼 육체적인 관계가 묘사된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연인들. 밤을 기다린다. 누군가는 그것도 사랑이냐고 비웃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여자와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일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와 그려보는 미래. 모두에게 필요한 그 마음은 광장에서 밤에 만난 한 여자 때문에 시작된다. 내가 얻은 일감은 <낯선 동네>을 마음껏 쳐부수는 일이다. 여자 때문에 화가 나서 여자 때문에 돈을 벌고 싶어서 때려 부순다. 낯선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잃을 것이라도 있지만 잃을 것도 없는 나는 아쉬울 게 없다.


왜 <낯선 동네>라고 이름 붙였을까. 대도시 한 복판 고층건물 사이 어딘가에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 동네라서? 철거되어야 하는 그 동네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해서? 88 올림픽 때였나? 외국인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동네라서 쫓겨났다던 그 똑똑한 선배 이야기가 떠오른다. “넌 그런 동네 모르지? 난 그런 데서 살았어.” 그 선배는 그 동네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을까? 인기 많았던 기업에 입사했으니까 적어도 이젠 모두가 부러워하는 동네에 살고 있으면 좋겠다. [마징가 계보학]을 썼던 그 사람도 달동네를 탈출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다는데... 그런 동네가 어떻게 철거될 수 있는지 한 장면을 본 것 같다. 무자비한 폭력 현장이 매스컴에 오를 때 대면하기 불편했는데, 어떻게 인간성이 그렇게 되도록 대한민국, 너는 그럴 수 있느냐 작가가 묻고 싶었던 것일까? 글로서 항의한 것일까? 이런 사람들을 돌아봐달라고 호소하고 싶었던 것일까? 왜 이런 글을 썼을까? [치킨런]에서도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나왔다. 블랙 유머를 담아서 불편하지만 아이러니를 담아서 짧게 끝냈다. 나쁘지 않았다. 이 [중앙역]은 다르다. 아프다. 읽는 내내 한 줄 한 줄에 베인다.


<기다림>에서는 그 여자 대신 젊은 여자가 등장한다. 세 번이나 거리에서 아이를 낳은 젊은 여자이다. 늙은 여자가 될 수 있는 환경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이 <기다림>이 없다면 [중앙역]은 성립되지 않는 걸까?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한 여자는 이미 두 다리를 잘라냈다. 살이 썩고 있는 냄새나는 여자. 광장에서도 가장 밑바닥 인생이라 할 수 있는 늙은 여자. 목발 짚은 장애인. 수급자다. 그 늙은 여자를 보며 늙어가고 있는 여자가 말한다. 나도 저렇게 될 거라고. 겁이 난다고 했던가? 무섭다고 했던가? 술을 진통제로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 고통으로 배가 부푼 여자와 진짜 임신해서 배가 불러올 어린 여자. 기다렸던 여자, 연인이 나타나자,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또 다른 낯선 동네의 쪽방에 들어가 살림을 차린다. 쪽방 옆 또 다른 방에는 아주 어린 여자 아이, 광장의 네 번째 여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철거 예정지의 삶은 순탄하지 않다. 늙은 여자처럼 수급자가 되고 싶어서 가족을 찾아 떠나지만 실패한다. 한때 여자가 살았던 동네는 낯선 동네가 되어 철거되었을 테고 그 위에 아파트가 올라섰겠지. 여자의 동네는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남은 것은 신분증을 파는 것. 이름을 파는 것이다. 어리석은 짓이지. 벼랑 끝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끝내 지켜야 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고? 삶이 완전히 파괴되는 건 이름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당신의 이름>을 고작 하룻밤 돈 몇 푼 주머니에 담자고 팔았나? 돈 몇 푼이 아니었다고? 당신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는 사랑이었다고? 목숨과도 같은 사랑이었다고? 광장에서 그렇게 살았으면서도, 밤의 수심을 그렇게 겪었으면서도, 여자의 연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것도 사랑이라고? 자신의 존재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도 자신의 정체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당신의 이름을 팔아버린 건 실수였다.


<가라앉은 고백>에서 뭘 말하고 싶은 것일까. 모르는 사람이라고요!? 여자의 이름을 귓가에 대고 불러주었다고 했다. 응급실에서 당신은 누구냐고, 무슨 관계냐고, 그럴 때 그 이름 나도 듣고 싶었다. 독자로서. 끝내 작가는 밝히지 않았다. 끝내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또 놓친 걸까? 두 번 읽으라고? 처음엔 그랬다. 훌륭한 소설이라니 두 번은 읽어야겠다고. 문장에 그 흔한 포스트잇을 붙이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나 두 번 읽고 싶지 않다. 가슴에 피가 나는 이야기다. 지금 당장 역에 나가면 만나게 될 사람들이니까. 역에 사는 사람들을 흘끗 쳐다보는 것도 고통이니까. 몇 시간 동안 [중앙역]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시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낯선 책장을 넘기다가 익숙해졌다. 한 젊은 남자가 중앙역에 들어선 그 낯선 밤처럼. 그리고 점점 광장을 꿰차고 광장에서 다시 외면받는 존재가 되는 처절한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건 뭐였을까. 이런 민낯의 나를 한 번이라도 마주해 보라고 거였을까? 아니면 이런 사람들을 위해 주머니를 열라? 아니, 네 삶이 그 어떤 밑바닥이라 해도 이런 광장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삶이 지루할 정도 평범해서 파격적인 소설 읽는 재미로 산다는 그녀가 떠오른다. 그쪽에는 낄 수 없을 것 같다. 문장의 칼날에 베여 따끔거린다. 독자로서 내 고백, 가라앉아 흘러나오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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