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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

뻬드로 빠라모, 페드로 파라모

by 조이스랑


2023년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뀔 무렵, 도서관에서 고전 읽기를 했다. 대학 졸업 후 자기계발서만 읽었는데, 소설이라니 그야말로 인생 후반전을 여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진행자는 <백 년의 고독>이 힘들 수 있다며 분량이 적은 <뻬드로 빠라모>로 바꿔 읽자고 제안했다.

<백 년의 고독>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쓴 - 교수가 침을 튀어가며 극찬을 했기 때문에 - 남미 작가의 책이었다. 대학시절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읽긴 했으나 복잡하고 성적인 부분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흐릿한 느낌만 남았다. <백 년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작가 후안 룰포. 이름도 생소하고, 책 제목이 발음 때문에 특이했지만 그 덕분에 기억하기는 쉬웠다.


단단히 각오하고 메모를 했기 때문에 인물이 새로 등장할 때마다 뻬드로 빠라모를 따라가며 길을 잃지는 않았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알고 보니 죽은 사람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죽은 사람들을 산 사람과 같이 등장시켰다. 마술적 기법이라고 했다. 소설이 죽었다,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고 유럽이 한탄할 때 등장한 마술적 기법. 뻬드로 빠라모를 몇 줄로 정리하기 어려웠다. 남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 나라의 종교적 특징 역시 몰랐다. 유럽에서 건너온 가톨릭이 남미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 종교, 글을 쓴 작가의 생애를 모른 채 읽은 줄거리만을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좁은 시야인가. 작품을 대하는 독자의 태도, <뻬드로 빠라모>는 한마디로 내게 겸손을 배우게 한 작품이었다. 독자의 틀로 작품을 읽는다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배경 지식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최인호 <타인의 방>과 영화 <완벽한 타인>을 나란히 토론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타인>을 다시 보아야 했다.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화에서 은근히 상대방을 깍아내리는 장면, 주제를 품고 있는 대사를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넷플릭스에 들어갔을 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페드로 파라모>였다.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첫 부분 주인공이 걷는 장면을 보자, 저건 알고 보니 죽은 자였지. 감독은 어떻게 이 마술적 기법을 영화로 담았을까 궁금했다. 인물이 바뀔 때마다 저이는 죽은 사람였을 거야, 추측하는 재미가 있었다. 줄거리도 서서히 기억이 났다. 잔인한 페드로 파라모는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 이제야 소설가가 한 편의 이야기를 통해 가려고 했던 방향성을 생각한다.

<뻬드로 빠라모>를 토론할 때 흐름이 난해해 잘 잡히지 않는다는 참가자가 많았었다. 이제 영화 <페드로 파라모>가 있으니까 마술적 기법도 줄거리도 훨씬 이해하기 쉬울 거다. 소설과 비교할 수 있는 영화 때문에 다시 <뻬드로 빠라모>를 읽어보고 싶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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