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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Mar 10. 2022

파묵, 젊은 날의 초상, [세브뎃 베이와 자손들]

파묵, [세브뎃 베이와 자손들], Gallimard, 2014.

 이 책을 읽으면서 젊은 시절 헤매던 우리의 모습이 오롯이 되살아났다.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젊은이들의 고뇌는 똑같았다. 이십 대 중후반에 이른 젊은이들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동양과 서양, 편협한 민족주의와 과격한 진보주의, 존재론적인 고뇌와 방황… 작가는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을 호소력 있게 파헤친다. 오르한 파묵은 치기 어린 세 엘리트 젊은이의 초상을 시대와 맞물리게 하면서 때로 만화경처럼 때로 현미경처럼 참 잘 그려낸다. 서른이 되기 전에 훌륭한 시를 쓰지 못하면 자살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던 무히틴, 발자크의 야심 찬 라스티냐크를 꿈꾸며 보통사람하고 다르게 살 거라고 허풍 떠는 오메르, 앞의 두 인물에 비해 비교적 온건하고 현실안주형인 세브뎃 베이의 둘째 아들 레픽…


 크게 보면 세브뎃 베이 가족 삼대의 변천을 시대순으로 다룬다. 한국 소설과 비교하자면 박경리의 [토지]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러 사건의 줄거리를 따라 펼쳐지는 대하소설 풍이라기 보다는 각기 독립된 장면 묘사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생략된 사건의 흐름을 다음 장면에서 회상이 아니라 다른 인물의 입을 통해 정보를 제공하면서 감춰진 이야기가 드러나고 사라진 인물이 다시 무대에 등장한다. 이 점 샬의 서술 기법을 떠올릴 법하다.


 파묵의 작품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인물에 따른 시점과 각 인물의 목소리, 특히 내면 독백을 통한 심리와 상황 묘사이다. 제라르 주네트에 따르면 « 누가 보는가? »가 아니라 « 누가 말하는가? »에 해당한다. 작가는 대화나 내면 독백을 통해 사건을 전개 시키고 갈등을 고조시킨다. 대신 묘사를 통한 이야기 전개 부분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리하여 폴리포니의 목소리가 작품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면서 이야기가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한국어 번역판 제목이 어떤지 한번 찾아보았다. [세브데트 베이와 그의 아들들]이다. 제목에 문제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자칫 "아들들"이라고 보기 쉬운데 "자손들"이 더 낫지 싶다. 세브뎃 베이의 이남 일녀와 그의 손자들까지 주인공으로 나온다.


 작품 전체를 떠받치는 배경 인물은 제목으로 나오는 세브뎃 베이다. 대학을 나와 파리까지 다녀온 이상주의 혁명가를 자처하는 형 너스렛과 달리 세브뎃은 지방에서 이스탄불로 올라와 아버지와 함께 나무장수로 출발해서 전구나 설탕 수입를 통해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작위나 유산을 물려받은 전통적인 지배층이 아니라 혁명으로 공화국이 된 터키에서 상업을 통해 신흥 부자가 된 새 시대의 지배층이다. 세브뎃은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기반으로 대가족이 한 집에 오손도손 모여사는 화목한 가정을 만든다. 세브뎃의 맏아들 오스만 대에 이르면 이 가문은 더욱 번성한다. 오스만은 수출입 사업에다가 전구 공장까지 설립하여 더욱더 확고한 경제력을 키운다. 그는 어머니 니간 하님의 결사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가 사서 정착했던 니산타시의 전통적인 주택을 허물어 현대식 건물로 다시 짓는다. 이 장면에서 신구 세대의 갈등을 첨예하게 엿볼 수 있다.


 가장 온순하고 평온한 성격의 레픽이 극심한 존재론적 고민에 빠진다. 부잣집 둘째 아들에 미녀 아내까지 맞아 부족할 게 없는 그가 인생의 허무함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는 루소의 계몽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회사 출근을 그만두고 농촌을 개발하는 계획에 투신한다. 반면, 평범함을 거부하고 온 세상을 다 정복할 것 같던 야심가 오메르는 가장 현실적인 속물로 바뀐다. 그는 벽촌의 산간 지방으로 가서 철도공사를 맡아 엄청난 돈을 번다. 자아도취에 빠져 보들레르 같은 시 세계를 추구하던 무히틴은 시를 포기하고 편협한 터키 민족주의 쪽으로 기운다. 결국 자신의 시재가 없는 것을 감추려들면서 자살도 거두고만다. 무히틴은 민족주의계 잡지의 판권을 차지하고 세력을 행사하려는 기회주의자가 된다.


 파묵의 소설에서는 서구 문화, 특히 프랑스 문학을 동경하는 인물이 많이 나온다. 특히 파묵 자신이 네르발의 작품, 예를 들어 동양과 서양을 비교할 때 [동방 여행]을 자주 언급한다. 아주 먼 옛날 터키를 아나톨리아(동방)라고 불렀다. 이스탄불(옛 이름이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 자체가 동양과 서양의 다리 역할을 하는 위치다. 또 그 도시 출신인 터키 엘리트들은 프랑스계 고등학교(갈라타사라이)를 나왔다. 자연스럽게 파묵의 인물들은 파리와 프랑스 문학에 빠져 터키의 동양적인 전통 문화와 서구 문화 사이에 갈등한다. 그 가운데 몇몇은 파리에 유학하거나 도피행으로 방문하고 돌아온다. 실제 대표적으로 파묵의 아버지가 가족 모르게 파리로 황홀한 실종을 한다. 아버지가 파리의 몽마르트르 호텔에서 소설을 쓰려고 도피행을 감행했던 일화를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밝힌다 ("아빠의 여행 가방", [다른 색깔들]). [세브뎃 베이]에서도 레픽이 파리를 방문하여 생제르맹 데프레의 카페에서 글 쓰는 사르트르를 마주치는 일화가 나온다.


 시간이 흘러 이야기의 표면에서 사라진 인물의 늙음과 죽음을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근황을 들려주는 수법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이런 서술이다. 한 인물의 시점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마치 무비 카메라가 옮겨가면서 비추 듯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재주는 정말 탁월하다. 터키 공화국 탄생 15주년 기념식장 대기실에서 케말 파샤의 개혁에 적극 동참했던 나즐리(오메르의 약혼녀였다가 파혼한다.)의 아버지 무흐타르 국회의원이 여러 인물들을 마주치는 장면이나 1930년대 말에서 1970년대로 건너 뛰어 그 간극을 메꾸고 사라졌던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세브뎃 베이의 막내딸 아이세의 약혼식 날 세브뎃 베이 집안의 터전인 니산타시 건물 거실에 모인 여러 하객들을 아이세의 눈으로 각 인물들을 보여주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빨간색 드레스를 걸치고 기쁨에 들뜬 아이세가 자리를 옮겨 가면서 한 인물 한 인물과 인사를 나눈다. 이러면서 작가는 이야기에서 한참 잊혔던 각 인물의 근황을 카메라가 스쳐가듯 경쾌하게 묘사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1차 대전 중 다시 찾은 사교계 장면을 떠올림직하다.


 세브뎃 베이의 둘째 레픽은 계몽주의 관련 책을 출판하여 터키 사회를 개조하려고 꿈꾼다. 파리까지 다녀오기도 하고 부인 페리한과 이혼하고 다시 니탄타시 건물로 돌아와 살다 암으로 죽는다. 야망에 불타던 오메르는 자신이 철도 공사를 맡아 돈을 번 지방에 내려가 농장주로 정착한다. 군사 쿠데타가 곧 일어날 정국인 1970년대의 주인공은 세브뎃 베이의 손자 세대다. 오스만의 아들 세밀과 딸 날은 편안하게 부를 대물림하며 부르주아 계층으로 자리 잡는다. 반면 레픽의 아들 아흐멧은 속물스러운 그의 누나와 달리 혁명을 꿈꾸는 좌파 지식인 화가로 종조할아버지 너스렛의 혈통을 이어간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주의자들은 다 병으로 죽을 운명인지 모른다. 너스렛은 폐병으로 레픽은 암으로 죽는다. 아마도 아흐멧도 또 다른 질환으로...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은 도시 이스탄불, 이 도시에서 상인으로 성공한 세브뎃 베이가 터를 잡은 부유층 동네 니산타시를 중심으로 터키 최고의 엘리트 세 젊은이들의 방황과 모색을 격동기 터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배경으로 때로는 삶을 즐기는 부유층의 여유롭고 평화로운 생활상을 때로는 인물들끼리 서로 세계관이 달라 극단적인 갈등으로 치닫는 드라마를 시리즈 형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탁월하게 연출해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젊은 날 우리의 초상을 되새겼다.



***

궁시렁궁시렁


 언제부터 문학 비평이라는 말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대신 서평이 슬그머니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제는 주로 간략하게 줄거리를 요약하고 촌평하는 글로 책 소개를 하는 북스타그램이 대세다. 순수 문학이니 대중 문학이니 하면서 문학의 질을 따지던 시절은 벌써 먼 옛날이다.


 비단 이런 현상은 문학계에 치우친 현상은 아닐 터. 모든 분야에서 가치 기준이 달라졌다. 모든 게 광고를 통해 판매 실적을 올리는 쪽에 집중된다. 내용물보다 포장이 우선한다. 소비자가 왕인 시대에 미디어를 통해 조금이라도 눈길을 끌고 호기심을 유발할 수단이란 수단은 다 동원해야 한다. 인터넷 매체에서 클릭 횟수나 좋아요 숫자가 상품의 질을 판가름하기에 그렇다. 이런 무한 경쟁 시장에서 쏠림 현상은 불평등의 골을 더욱 깊게 한다. 잘 되는 몇 개의 상품은 더욱더 잘 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소리 소문 없이 밀려난다. 플랫폼 기반의 시장에서 얼마나 노출되느냐가 성공의 열쇠니까. 불특정 대중한테 노출되지 않으면 클릭이며 좋아요는 꿈도 못 꾼다.


 어쩌면 문학 분야는 날이 갈수록 하향 평균화로 치닫는 지도 모른다. 자조적이지만 시 독자보다 시인이 더 많은 사회라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극이나 고전 음악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그랬지만 공연과 연주는 가족 잔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문학도 그 길을 뒤따라 걷는다. 글을 쓰는 몇몇 사람이나 아니면 문학 연구가를 제외하고는 거들떠 보지 않는 게 문학 서적 아닌가(?)


 훌륭한 작품은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을 테지만 늘 그랬듯이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은 대중한테 읽힐 가능성은 적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문학성과 대중성은 동반하기 힘든 것 같다. 달리 보면 원래 대중은 어느 시대나 그런 작품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중성이 별로 없는 작품 몇을 소개하면서 떠올려 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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