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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Feb 21. 2022

단편보다 짧은 단상

다큐 3일 마지막 회

전남 무안의 양파 수확을 위해 할마시들이 새벽 댓바람부터 트럭에 실려간다. 

"할머니 어디로 가요?" 

"나도 몰러" 라며 차는 떠나고 , 바뀐 화면은 무안 벌판. 널리 흩뿌려져, 아니 도톨도톨 튀어나와 있는 양파밭에 사람이 흩뿌려지는 화면이 나온다. 한반도 도로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지평선을 만날 수 있는 곳, 무안이다. 해남의 배추농사까지 이야기는 이어지고, 이 화면은 도시에 지친 눈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다. 먹고 마시는 색, 근원이 되는 색. 녹색이다.  

단상 # 무안은 일본인 소작농에게서 소작료를 낮추기 위해 투쟁을 벌였던 역사의 땅이다. 운동은 이후 농민조합 운동으로 바뀌었고, 시대를 타고 흘러 1980년 , 농민들의 정면 투쟁을 만들어낸 역사가 있다.

가장 아픈 역사인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에는 이 지역으로 시민군들이 초반에 이동해서 한숨을 고른 후 다시 광주로 재 진입한 시간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회인 줄 몰랐다. 화면 윗단에 작게 표시된 날짜를 보니 예전 방영분들 중 일부를 다시 보여주고 있다.

어쩐지 이런 기억들이 갑자기 pdf파일 튀어나오듯이 생각난 것이 아니라 강제 데자뷔 된 것. 혼자 생각하고 있기를 잘했다. 굳이 떠들면서 봤으면 또 와이프가 말없이 쳐다봤을 터, 습자지보다 얇은 지식수준 아닌가.


제천 연탄공장이 나온다. 지금도 공장이 있을까? 며칠 전 후배의 피드에서 "연탄나누기 자원봉사"를 본 기억이 있으니, 여전히 연탄은 있겠지. 희귀한 물건이다. 쓰는 사람도 희귀해졌고.  

마지막으로 연탄을 쓰던 집에서 살던 시절이 기억하기로는 중학교 때까지였다. 서울에서 가장 큰 임대아파트 단지였던 강동구 암사동의 암사 시영아파트. 작은 평수는 9평이고 , 공동화장실을 쓰던 곳이었다. 옆집 앞집과 사이가 좋으면 공동화장실의 관리가 좋았다. 안에 무려 샤워를 할 수 있도록 솜씨 좋은 아버지들이 수도를 달기도 하고, 겨울에 얼지 말라고 순간온수기를 단 집도 있었다. 그리고 연탄. 암사 아파트는 연탄을 때는 곳이었다. 1층에 만들어진 연탄 광은 좁기도 좁고 , 5층에 사는 집이면 다리품 삯을 감당할 수 없었다. 지금보다 절대 수입이 가난했지만 상대 근면이 높았던 시절이었다 해도 하루에 두 번, 많게는 세 번. 불구멍을 맞춰줘야 하는 연탄 갈이는 쉬운 일이 아닌 것. 화장실 한켠, 연탄을 줄로 세워 벽을 만들었다. 볼일 볼 때도 조심해야 했고, 물을 끼얹는 것은 혼쭐날이 이었다. 착각이 분명하겠지만, 연탄으로 데운 물은 왠지 더 뭉근하게 따뜻했고, 쉬이 식지 않았다. 연탄 방은 지문처럼 집마다 뜨뜻한 곳이 다르다. 집마다 장판이 늘어진 곳이 달랐다. 얼굴 기억하기도 버거운 삶인데 , 엉덩이가 연탄 자욱을 기억했다. 덕분에 기억 많은 동네에서 자랐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군산 임피역 마지막 기차도 나온다. 방송된 시절이 지금부터 몇 년 전 일터, 작년에 가본 군산에서 "임피역"은 끊어진 열차길을 기억하고 있는 관광지로 남아있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 임피역을 못 보고 돌아왔는데, 화면으로 보여주는 임피역은 영화 속 "백마역"만큼 매력적이다. 플랫폼이 없는 맨땅에서 올라타는 기차는 늘 매력적이지 않은가. 없어졌으니 그리운 것이겠지만, 대전역에서 팔던 뜨겁지만 뜨겁지 않은 500원짜리 가락우동도 그립고 , 경북 영주에서 반대방향으로 기어올라가던 강릉행 밤차도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던가.

"춘천 가는 기차"는 지금 열차환경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노래 아닌가. 소래포구에 있던 협궤열차는 낡은 기억들에게만 남아있고. 열차들이 다 그렇지 머. 절대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길이 사라져 버리니까 두배로 서운하고 그렇지. 


여기까지였다.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그런 티비 프로 하나가 끝났다. 매일 바쁜 척해야 하는 시절, 일요일 저녁 맥주 6캔 들어있는 팩을 티비앞에 놓고 혼자 눈물 그렁그렁하면서 "나보다 더 아름답게 사는 세상 사람들" 이야기를 보던 시간이 끝났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런 시간도 있어야 목욕탕 다녀온 것처럼 개운해지던가. 가산동 할인매장 표 양복을 입고 출근하던 신입사원이 , 문 닫은 가게들 밑으로 명함과 전단지를 돌리던 여름도 몇 번 지났고, 백수의 겨울도 몇 해 지났다. 

일주일처럼 일 년을 살아 별반 변한일이 없다고 위로하며 살던 시간이 쌓여버렸다. 

별반 재미없더라도 빈칸을 채울 수 있는 단편소설 같은 것 몇 편은 나올 시간을 기대하며 보냈을 텐데, 정작 지나고 보니 단편 정도까지도 못 가는 단상만 남았다. 티비는 회차가 차고 넘치는데, 즐겨보던 내 인생은 회차가 많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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