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의 무게

(25) 리처드 2세, 윌리엄 셰익스피어

by 예쁨


<리처드 2세, 4막 1장 독백>


거울을 다오, 그걸 보고 읽으련다.

아직 주름이 덜 잡혔어? 슬픔이 이 내 얼굴 위에

그 숱한 가격(加擊)을 하였으되, 더 깊은 상흔을

남기지 못했나? 아, 거울도 아첨을 하는구나-

나 한창 좋은 세월이었을 때 날 따르던 무리처럼,

거울도 날 속이는구나. 이 얼굴이, 날이면 날마다

왕실 지붕 아래에서 일만 명을 거느리던,

바로 그 얼굴인가? 이 얼굴이, 마치 태양인 양,

보려는 사람 눈부셔 눈 감게 하던 그 얼굴인가?

이것이, 그 숱한 망동(妄動)들을 눈감아 주다가 마침내

볼링브로크가 들고일어나도록 한 그 얼굴인가?

부서지기 쉬운 영광 이 얼굴에 빛나는구나.

이 얼굴도 영광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 [거울을 바닥에 집어던진다]

저것 보아, 일백 개의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진 걸,

말씀 없으신 임금, 잘 새겨 두시오, 이 장난의 의미를-

내 슬픔이 내 얼굴을 얼마나 빨리 깨뜨렸는지.


- 윌리엄 셰익스피어 / 이성일 옮김 -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시’라고 불려지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대본의 상당 부분이 시와 같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시와 산문을 상황에 따라 의도적으로 섞은 극대본이며 특히 핵심 장면과 독백은 고도로 완성된 시라고 볼 수 있다.


위 글은 그의 유명한 극작품 중 하나인 <리처드 2세> 4막 1장에서 리처드 왕의 독백 부분이다.

읽다 보면 이게 대본인지 시인지 헷갈리는데 그 해답은 작품해설에 있었다.

극작품의 대사는 대부분 ‘약강 오보격 무운시’로 쓰였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약강 오보격‘이라는 영시의 대표적인 운율형식을 자주 사용했는데,

한 시행이 10음절이며 약음절과 강음절이 한 음보씩 다섯 번 나타나는 시격 형태를 말한다.

비슷한 의미로 블랭크 버스(blank verse)가 언급되기도 한다.

* 약강격(iamb) : 약한 음절 뒤에 강한 음절이 오는 형태
* 오보격(pentameter) : 약강격이 한 행에 다섯 번 반복되어 총 열 개의 음절로 이루어지는 것
*무운시 : 각운을 쓰지 않는 시

솔직히 해석을 읽고 나서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작품 상당수가 시의 형식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다는 것,

그래서 시처럼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는 점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의 글에는 단어 하나 또는 행 하나에 감정과 시간이 압축되어 있는 듯하다.

사건보다는 감정이, 이야기보다는 이미지가 남게 되는 시처럼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도 문득 떠오르며 당시 느꼈던 감정을 불러온다.

어떤 한 줄이 한 세기를 대신해 쓰인 것처럼.

이것이 바로 시의 힘이다.



셰익스피어는 리처드 왕의 비극을 이렇게 요약했다.


“왕관은 머리에 얹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




왕은 신이 아니다.

혹여 왕의 자리가 오랜 시간 유지되었다 할지언정 사유가 빠진 권력의 모습은 거울처럼 깨져버리기 십상이다.

결국 나라는 곤궁에 빠지고, 백성은 서서히 말라갈 것이다.

어디 지도자뿐이랴,

사회적으로도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공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리를 붙잡는 일은 오래갈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을 붙잡는 일은 그렇지 않다.

사유를 잃은 권력이 남기는 건 쓸쓸한 왕관뿐이다.

우리는 이미 그 장면을 여러 시대에 걸쳐 본 적이 있고, 오늘날의 풍경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두머리의 이름과 국가는 바뀌었으나, 왕관을 쓴 채 사유를 내려놓은 자들은 여전히 무대 위에 있다.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진정한 왕관은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

문학과 역사 속에 왕관의 무게가 담겨있다.


지도자들이여,

문학작품을 가까이 하여라.

사유를 잃지 않는 일은 교양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by. 예쁨

누렁이는 버거킹.

(햄버거 좀 그만 먹어!)





네가 그 사람들에게 배웠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너한테서 뭔가를 배우게 되는 거야.

이건 정말 아름다운 상호 간에 원조인 셈이지.

이건 교육이 아니야.

역사이며 시인셈이지.


-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




*커버사진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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