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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태와 태만 Oct 31. 2022

도구. 그 좁은 문을 지나면 발견하는 생각의 길.(7)

미술에 등장한 물리적 현상과 실험을 통해 증명하려는 미술가들.(2)

 후원자의 의지와 요구에 따라 형의 경계에 몰두하던 미술가들은 후원자를 잃고 나서 형의 경계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는 시대를 맞이한다. 사실 이 경계에 대한 집착의 역사는 길다. 플라톤의 객관적 관념론에서부터 이 집착은 시작한다. 생각을 객관화하려 노력한다는 의미는 보이지 않는 것을 구체화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구체화는 묘사에 의지한다. 이성적인 묘사에 해당하는 서술, 기술과 같은 글로 쓰는 묘사(text)는 정보를 객관화할 기준이 필요하다. 기호는 반드시 인식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기준을 수학, 과학과 같은 학문에서 먼저 세우고, 세워 둔 그 기준을 차용하면서 묘사한다. 예를 들면 길이, 면적, 무게, 부피 등을 인식하게 할 공통의 기준이 정한 것에 우선하고 그것을 담보하여 묘사한다는 의미이다. 사물의 물리적 상태 정보를 묘사할 때 이 방법은 유효하다. 이 방법은 먼저 우리의 인식 속에 미리 심어둔 기준이 작동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기준이 원활하게 작동하려면 기준이 되는 이 관념을 이해하기 위한 개인의 경험이 필요하다. 경험을 통해 획득한 기준이 객관적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척도를 마련해야 하고, 그 척도에 대한 신뢰의 당연함이 공적으로 담보되어야 한다. 척도에 대한 경험이 많아질수록 기준에 대한 자기 확신이 발생한다. 자 없이 10cm, 30cm, 1m를 임의로 상정해 보라. 자신의 척도에 대한 친밀성을 확인할 수 있다.


 대상을 바라보고 그리는 그림(image)과 같은 직관적인 묘사는 감각기관에 의해 시작한다. 그리고 인식을 거치지 않고 묘사할 수도 있다. 이런 묘사는 개별적인 지각의 주체가 다르고 상태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정보를 객관화할 기준의 준거가 미흡하다. 아니 너무 방대하다. 이런 방대한 기준의 준거를 단순화하는 것이 척도가 해왔던 일이다. 감정의 상태도 물리적으로 변환하려는 시도가 그렇다. 교육의 현장이나 사회 등에서 객관적 담론을 형성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의미 미분법에서 정서적, 내포적 의미를 삼차원의 공간으로 끌어들여 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그렇다. ‘매우 좋다’, ‘꽤 좋다’, ‘조금 좋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 ‘조금 싫다’, ‘꽤 싫다’, ‘매우 싫다’ 따위로 표기하거나 선택하는 것 말이다. 인간의 감정과 정서가 7개로 정리될 수 있다고 가정해야 가능한 방법이다. 이런 생산자적인 관점의 시도들 덕분에 저것에 속하지 않으면 아주 예민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난 못마땅하다. 이런 시도가 익숙해지면서 직관적인 묘사도 꽤 객관화할 수 있었다. 아니 객관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믿음이 미술의 역사에서 형의 경계에 대한 의미를 확대 강조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그렇게 미술의 역사에 등장한 단어가 '비례'(proportion)이다.


 3 년 전 즈음 이 두 가지 묘사의 경계를 학생들과 실험해 본 적이 있다. 작품은 직접 만들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구상하여 이를 세밀하게 서술하는 과제를 통해서다. 쉽게 얘기하면 없는 작품의 작품 설명을 쓰라는 것이다. 즉 물리적인 상태는 없다. 하지만 머릿속에 인식은 있다. 인식이 발생하려면 감각의 과정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과정을 배제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식의 형태를 인식 속에서 직관적 형태라고 가정하며 직관이 아닌 이성적 묘사를 통해 구현하라는 의미였다. 재미있는 결과물을 하나 소개해 보기로 한다. 글로 서술할 때 척도가 없는 직관적 묘사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방, 낮은 밝기, 웅얼거리는 소리, 분수 형태의 작품. 수직적인 3단의 구조. 맨 아래는 무릎 높이의 넓은 원통형. 중간에는 허리 높이의 좁은 바둑돌 형태. 그 위에는 동전 세 개, 혹은 좀 더. 하지만 수북하지는 않습니다. 동전이 쌓이면 흘러 떨어질 듯 표면이 매끄럽습니다. 바둑돌보다 넓은 투명한 원판이 손이 닿지 않을 거리에 있습니다. 물이 조용히 흘러 원판의 호를 타고 맨 아래의 원통까지 떨어집니다. 파동이 생깁니다. 기원이라는 짧은 단어. 그곳에서 저는 사람들이 던지는 말을 수집합니다. 저는 반응하는 사람들에게서 만족감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동전을 던졌을까 생각합니다. 동전은 돌고 돌아 그들의 손에 들어온 것이니 완벽히 자기 동전은 없는 셈입니다. 서로 연결된 사람들. 동전에 각자가 부여한 의미가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그냥 동전 무더기일지 몰라도 자신이 던지는 그 동전은 특별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동전이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되고 행위의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쌓인 동전들. 각자의 이유로 한 곳에 모여 흔적을 남깁니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부분을 끄집어냅니다.”



글을 통한 인식이 뿌열 수밖에 없다. 여전히 척도가 해결할 수 없는 형용사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시대마다 형용사들의 척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직관적인 묘사가 척도 없이 직관 그대로 기능하게 내버려 둔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정말 다양한 직관적 묘사들이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긍정적 기대에서 시작한 흥분과 미술의 역사에서 훨씬 이전부터 직관적 묘사에 의해 역사의 혼란을 이끄는 바벨탑이 되었을 거라는 걱정이 공존한다.



수 천년 동안 쌓인 형의 경계에 대한 집착을 허물어 내기 시작한 사람들이 인상주의자들이다. 특히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에 대한 언급을 해야 한다. 모네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그림으로 교류하고 영향받는다. 그랬던 모네가 가진 관점은 대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 그리고 편견 없는 사물의 상태를 직관적으로 기록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직관적인 기록을 위해서 대상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 편했다. 대상의 이름을 통해 대상의 인식이 머릿속에 먼저 자리 잡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네는 자연을 사랑했다. 이름이 붙여진 사물보다 무명의 자연이 자신의 직관적인 묘사를 위해 합당했기 때문이다. 모네에게 자연 중 가장 큰 상수는 빛이다. 사물을 감각하는 시작이 빛에 의해서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빛 이외의 사물은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생각했다. 이 생각으로 모네는 사물의 경계를 허물 수 있었다. 빛 아래 동등한 사물의 지위.


 그림 속의 소재가 된다는 것만으로 그 대상은 매우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화가에게 소재의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화가가 아름답다고 감각한 소재는 더 그렇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올랭피아’로 분한 여류 화가보다 훨씬 긴 시간을 그때의 그 상태로 살아남는다. 미술가가 기록한 그 대상은 고유 명사로 규정된 대상의 보편적 관념보다 더 깊은 관념을 가지게 된다. 그 대상이 존재했던 상태, 상황, 서사 등 대상이 가진 조건뿐 만 아니라 시간, 공간, 장소 등 대상 밖의 조건도 동시에 버무려져, 대상의 특정한 한 시공간을 미시적으로 박제한 기록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가에게 소재의 선택은 중요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모네는 빛 아래 모든 사물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추수가 끝난 후 생명력을 다한 건초더미도 빛에 의해 아름다워진다면 그림 속 소재가 될 수 있고, 생명력을 가진 사람의 경계도 빛에 의해 형태를 허물어 인물과 풍경은 동등하며 인물과 풍경이 호흡하는 순간이 아름답다면 건초더미의 아름다움과 별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결과를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모네의 표현에서 대상은 관조적으로 느껴지고 그림을 통해 감상자가 느끼는 감상의 원거리가 발생한다. 심지어 자신의 자화상에서도 말이다.


 

claude monet / woman with a parasol

 모네의 '우산을 쓴 여인'을 살펴보자. 밝은 하늘에 제법 긴 그림자를 가진 대상을 역광으로 그린 작품이다. 역광으로 그리겠다는 의미 자체가 대상 자체의 정보를 지우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대상을 식별하기 위한 눈, 코, 입의 묘사에 몰두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은 이미 그늘이라는 어두운 속성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빛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화가에게 어둠 속에 배치된 사물(대상)이 과연 중요할까? 이 그림에서 우리가 선명하게 식별할 수 있는 대상의 고유색은 하늘, 구름, 빛을 받은 노란 꽃 정도이다. 그러니 이 그림을 통해 가깝게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은 자연스럽게 언급한 세 가지의 대상이다. 하지만 꽃은 가깝게 있지만 선명한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다. 심지어 여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있는 열몇 개의 채도 높은 노란 점들은 흔들리는 바람에 의해 형태가 으스러졌다. 선으로 표현된 흰 구름과 회색 구름은 선후의 차이가 있으나 눈을 찡그리고 봐야 형태가 인지 될 정도이다. 결국 이 그림 안에서 주인공은 정오 전 후의 하늘과 바람이 불고 있는 언덕의 상태인 셈이다.

 하늘. 하늘은 구체적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대상을 관념적 대상이라고 정의한다. 대상이 너무 커서 대상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형태가 없는 색 만으로도 온전하게 구현할 수 있다. 생생하게 구현된 모네의 하늘과 흔들리는 꽃, 나부끼는 드레스의 흐늘거리는 형태로 인식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바람만이 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관조적이지 않은 친근한 대상임을 깨달을 수 있다. 여인이 착용한 드레스와 상의는 경계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꽃과 풀의 색, 하늘과 구름의 색까지 담고 있다. 여인이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산도 무엇에 의해 지탱하는지 알 수 없다. 손도 그 구체적 형태가 소거되었다. 우산의 고유색도 식별할 수 있는 정보가 없다. 빛을 받는 부분에서 다시 하늘과 구름의 색이 드러나기 때문에 우산 안쪽의 녹색은 풀의 반사광 색인지, 빛이 투과된 노란색 직물의 어두움으로 표현한 색일 뿐인지 선명하지 않다. 그 옆에 아동의 반신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성별, 나이, 의복 등을 철저히 무명화시킨 모네의 그림에서 식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풍경 외에는 거의 없다. 또 이 풍경이 만들어진 현장과 현장의 상태, 기후와 계절의 상태 등이 버무려진 ‘그때’의 특정만 가능하다. 인물의 의복과 우산 등에 무참하게 파고드는 빛,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발생한 그늘과 그림자도 인물과 배경의 경계 없이 늘어져 모네의 관점은 대상을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한다. 대상을 오브제로 활용해 자신이 바라보는 사물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대상의 흔들림을 표현해 바람을, 색만 있어도 되는 하늘의 변화를 꼼꼼하게 따라가 자연을 표현하는 것. 그것으로 대상과 풍경의 미시적인 ‘그때’의 구체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세잔의 관점을 철저하게 받아내는 장면이 모네의 그림 구석구석에 존재한다. 세잔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시각적인 관점을 정립했다면, 오히려 모네는 사물의 속성을 숨기기 위해 세잔의 관점을 활용하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재미있다. 이런 관점을 통해 만들어진 모네의 실험적인 미술 활동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연다. 시각을 기반한 회화에서 시각적 정보에 대한 이성적 묘사를 배제하면 다른 감각을 통해 얻은 지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 인물이라는 대상의 관습적인 형태를 소거하며 대상과 배경이 빛의 현상과 호흡하며 회화의 생기가 발생할 가능성. 이 두 가능성은 이후 미술가들의 실험을 더욱 가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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