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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태와 태만 May 30. 2023

도구. 그 좁은 문을 지나면 발견하는 생각의 길(13)

진보적인 사회 현상이 담긴 미술은 진보적인가?(2)

 1878년 영국에서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가 러스킨(John Ruskin)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그리고 이때 양자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양자가 가진 미학적 관점이 드러난다. 이 관점에 대한 내용으로 당시 영국 내 여러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생산과 노동에 대한 이전과 달랐던 당시의 진보적 관점이 미술에 어떻게 투영하는지 알아보자.


<휘슬러의 사정>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by Etienne Carjat

 휘슬러는 미국인이다. 휘슬러가 9살 때 철도 엔지니어인 아버지를 따라 가족 전체가 러시아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러시아에서 보냈다. 당시의 러시아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을 받아 매우 근대적 규율이 엄했던 시절이었고 그러한 체제의 영향을 받아 미술도 철저하게 아카데미의 규율에 따라 교육되었다. 11살 때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에 등록한 이후 주변에서 미술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자유로운 미국에서의 생활과 달리 러시아 생활이 버거운 가족이 아버지만 러시아에 남긴 채 영국에서 살던 누이 부부에게 옮겨 가서 생활한다. 15살이던 해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가장의 자리가 비워지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고 휘슬러는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군인 학교에 들어간다. 휘슬러는 규율과 체제에 엄격한 삶이 싫어 반항하다 결국 퇴학당한다. 다만 군인 학교에서도 미술 교육을 이어받아 그림과 지도 제작을 배웠다. 학교를 나와 배운 이 기술로 군사적 목적을 가진 미국 전체 해안을 그리는 기안자로 취직하게 된다. 그곳에서도 휘슬러는 삶이 지루하다 생각했고 지도 대신 낙서를 잔뜩 하다 발각되어 미국 해안 조사국 에칭 부서로 옮겨졌다. 짧게 근무했지만 휘슬러는 이곳에서 에칭 기술을 습득한다. 일을 그만두고 부유한 친구와 어울리기 시작했다. 휘슬러는 매우 사교적이고 언변이 좋아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기어이 친구의 돈으로 프랑스로 떠나 미술가의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한다. 21세에 막무가내로 프랑스에 도착해 당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화풍에 영향받는다. 그리고 친구의 돈을 쓰며 방탕한 생활을 한다. 휘슬러는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자유로운 파리 예술가들의 삶을 즐겼다. 당연히 빚은 점점 불어나고 경제적인 압박을 받는다. 이 때문에 휘슬러는 더욱 가열차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루브르 박물관에 드나들며 수많은 모사품을 그렸고 그것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것도 잠시 휘슬러의 또 다른 부자 친구가 파리에 오면서 다시 휘슬러는 방탕한 생활을 이어간다. 휘슬러는 원래 병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23세가 되는 해 휘슬러는 죽음의 문턱까지 다달았다. 방탕한 생활을 하며 과도한 음주와 흡연이 원인이었다. 한 해를 요양하며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하고 휘슬러는 루브르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가던 정물화가 팡텡라투르(Henri Fantin-Latour)를 통해 사회주의자인 쿠르베(Jean Désiré Gustave Courbet)의 ‘사실주의자 모임’에 들어간다. 이 모임에는 당시 걸출한 초상화가인 미국인 존 싱어 서전트(John Singer Sargent)의 선생이 될 듀란트(Carolus-Duran), 조각가(메달리스트)인 레그로스(Alphonse Legros), 훗날 인상주의 거장이 될 마네(Édouard Manet), 시인이며 미술 비평가였던 그 유명한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가 속해 있었다. 휘슬러는 이 시기에 많은 자극을 얻어 왕성한 미술 활동을 이어 나가게 되었다. 초기에 나이가 가장 많은 쿠르베와 보들레르에 영향을 받았다. 쿠르베에게서는 관습을 멀리 하려는 프랑스의 문화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보들레르가 주장하던 예술에서 여러 감각의 융합 혹은 대위법(對位法)적인 치환에 대한 고민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 그 당시 전운이 감도는 프랑스에서 체류 중이던 많은 미술가들이 조금 더 부유하고 안정된 정치 기반을 가진 가까운 영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휘슬러 또한 마찬가지다. 이 시기 휘슬러가 잠시 프랑스로 돌아와 제작한 초상화(자신의 연인인 히페르난, <Joanna Hiffernan>을 그린 2개의 작품)에 훗날 ‘교향곡’(Symphony in White, No. 1: The White Girl)이라 명명한다. 이 명명 수단이 휘슬러가 영국에서 작품활동을 이어갈 때 비난과 논란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1860년 영국에서 휘슬러와 히페르난이 만났을 때 휘슬러는 26세였다. 하지만 히페르난의 나이는 고작 17세였다. 2년 후 그녀의 어머니가 죽고 히페르난은 휘슬러를 보금자리처럼 여겼다. 그녀의 어머니는 죽기 전 휘슬러에게 ‘나의 사위’라고 불렀다. 휘슬러 역시 훗날 히페르난을 자신의 대리인(총체적인 분야의)이라 소개할 정도로 상호 신뢰가 깊었다.

Symphony in White no.1(The White Girl) 1862


 사회의 진보가 예술가에게 제한이 없는 예술적 허용에도 진보적 입장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예술가의 삶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휘슬러였지만 그도 모든 면에서 마냥 자유롭지만은 않았다. 삶의 철학과 삶 속 현실이 가진 괴리의 단면을 그녀를 통해 보여주는 지점이다.

 물론 훗날 휘슬러의 아들까지 있었던 히페르난을 남겨두고 새로운 연인(Maud Franklin)과 휘슬러의 모습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휘슬러가 생각한 자유로움을 실천(?)하는 휘슬러의 양면성도 발견할 수 있다. 히페르난 역시 휘슬러의 매우 자유분방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표방하는 태도에 감화되었었기 때문에 그렇게 떠난 휘슬러를 말년의 그녀는 찾지 않는다. 휘슬러 역시 마냥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삶을 유지하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히페르난에 대한 심적 책임감에 대한 것도 그런 예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예가 있다. 자신의 동지라 여겼던 쿠르베가 히페르난을 그림 속 누드모델로 삼았을 때, 그녀와의 사이가 소원해지는 모습이 그러했다. 또 새로운 연인이었던 모드 프랭클린(재판 이후 위기였던 휘슬러의 4,50대 대부분을 함께한)과 세 자녀를 뒤로하고 휘슬러의 말년에 죽은 자신의 친구의 아내(훗날 Beatrice Whistler)와 전 여자친구 몰래 도둑 결혼을 하고 야반 도주하듯 사라진 모습 또한 그렇다.


 재판 이전부터 휘슬러의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미술 작품이 유명해져 부유해지길 기대했다(물론 그의 생애 안에서). 휘슬러는 이후 런던에 자리를 잡았고 경제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본격적으로 휘슬러의 작품이 휘슬러만의 성격을 가지기 시작했던 시기는 1866년 이유를 알 수 없는 칠레 방문 이 후다. 휘슬러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에서 멀어지려 애썼고 인물 중심의 초상화보다 도시의 풍경에 집중하려 애썼다. 사실주의의 대가인 쿠르베가 자신의 여자친구를 누드모델로 삼았다는 부분도 기꺼이 작동했을 것이라 보이고, 또 자신의 친구이며 인상주의의 선두 에두아르 마네의 유명한 그림 풀밭 위의 점심식사(Le Déjeuner sur l'herbe)와 함께 출품했었던 낙선자 전(Salon des Refusés)에서 마네보다 관심을 얻지 못했던 일, 또 동시대 영국 화단에서 같이 활동하던 자신보다 어린 미국인 초상화가 존 싱어 서전트(John Singer Sargent)에게 밀려 초상화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점 등이 휘슬러 스스로를 더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쯤 히페르난과의 관계도 소원해진다. 사실 링크를 걸어 두기 부담스러울 정도의 적나라한 쿠르베의 두 누드화를 보면 휘슬러의 분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 부글거리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1870년에 발발하고 휘슬러에게는 프랑스에 대해 심리적, 문화적 회피가 작동한 것처럼도 보인다. 이때 같이 영국으로 도피했던 피사로(Jacob Abraham Camille Pissarro), 모네(Oscar-Claude Monet)와 같은 화가들이 영국 생활을 함께 했고, 우연처럼 이들도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휘슬러는 10년 남짓 여러 방식의 판화와 장식 미술에도 관심을 둔다. 그리고 이런 관심의 결과가 모여 차곡차곡 제작된 작품을 가지고 1874년, 런던에서 개인전을 연다. 이후 3년 뒤 왕립 아카데미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던 그로스베너 갤러리(Grosvenor Gallery)에서의 전시에서 자신이 출품한 작품에 대한 러스킨의 혹독한 비평(Fors Clavigera: Letters to the Workmen and Laborers of Great Britain에서 언급한 ‘대중의 얼굴에 페인트 냄비를 던진 것에 대해 200 기니를 요구하는 것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을 알게 되고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사건의 발단이 된 그림은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로켓/ Nocturne in Black and Gold – The Falling Rocket(1874)>이었다.  

Nocturne in Black and Gold – The Falling Rocket(1874)




<러스킨의 사정>

John Ruskin, 1863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런던 태생의 지식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복음주의 기독교도였던 가족에게 매우 철저한 보수적 교육을 받는다. 그의 생애에 그는 지질학, 건축학, 신(화)학, 조류학, 문학, 교육학, 식물학, 정치 경제학, 심지어 동화의 영역까지 다양한 소재와 주제에 대한 글을 남겼다.

 빅토리아 시대는 1800년대 초중반 영국 사회의 정치 경제상의 안정을 담보로 발전하는 시민의식(중산층의 새로운 문화 소비)이 돋보인 시대였다. 이 시대에 달라진 정치 경제적 상황의 예를 들어 보면 공장법이 제정되어 아이들이 공장이 아닌 학교에서 교육받는 변화, 여러 문화적 다양성이 발달하며 지금 성행되는 스포츠가 발생하는 변화, 또 중산층이 확장하면서 여행, 관광이 성행하여 지금과 같은 리조트의 형태가 발생하는 변화, 또 남성 노동자 중심의 참정권이 여러 계층으로 점점 확대되는 변화 등이 이 시대를 이해하게 하는 변화들이다. 빅토리아 시대에 교육받았던 거의 모든 영국인이 그랬듯이 그들의 문화적 뿌리는 풍요로웠던 르네상스 시기의 관심과 유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러스킨의 모든 글에서 자연, 예술, 사회가 서로 연결되어 작동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관점이 글로 전환되어질 때 러스킨의 성격을 따라 매우 꼼꼼하며 치밀한 문법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그 총체는 변화하는 시대가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듯 도덕적이고 선도적이기를 바랐으며, 또 전통을 지켜나가길 바라는 전통주의자의 속내를 담아 충분히 선동적이기도 했다.

 

 미술에 대한 관심도 매우 커서 50세가 되던 해 옥스퍼드 대학 내 미술 및 미술사 교수가 되어 러스킨 미술학교(Ruskin School of Art)를 설립하였다. 20대 후반에 전통주의자인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를  옹호하는 글을 쓰며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다. 그는 글에서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규정하는데 이는 자연의 상태, 형태, 행태 등의 진실된 고지를 통해 자연의 위대함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러스킨은 라파엘 전파의 미술적 결과에 대해서도 비판하지만 여전히 자연을 소재로 작업하는 그들을 옹호하는 입장 변화를 견지하게 된다. 러스킨이 용인하는 미술은 딱 거기까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글들은 점점 더 정치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관여했으며 당시 영국 사회에 대두되었던 산업혁명 시기에 노동의 개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러스킨은 노동자들의 연대를 위해 자신의 사재를 아낌없이 털어 '성 조지 길드(The Guild of St George)'결성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산업화의 무분별한 가속을 해 매몰하는 인간성, 환경, 자연의 훼손 등을 우려하며 지속 가능한 친환경 에너지(수력, 풍력 등)의 계발을 촉구하는 주장을 설파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매우 급진적이기도 하면서 산업혁명 시대 이전의 산업에 대한 동경도 품고 있는 복잡한 양날의 사상은 시대가 급변하여 이득을 취하는 집단, 즉 당시의 권력가들에 의해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러스킨의 이러한 친환경적인 세계관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하게 유럽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얻은 것일 수도 있다. 또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글들로 얻은 수입으로 그 스스로의 사상에 온전하게 따라주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가 모아 온 터너의 작품 60여 점을 박물관에 무상으로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 목적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 터너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주장에 공감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많은 미술가, 공예가와 건축가 등이 자신은 러스킨에 의해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증언들이 남아있어 러스킨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 유명한 간디도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러스킨의 글 ‘마지막까지(Unto This Last)’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증언했었다. 생애에 러스킨은 존경과 명예, 부와 사회적 성취를 얻었다.


 러스킨의 영향을 받은 각 분야의 긍정적인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미술분야에서 러스킨의 영향력은 절대 긍정적이라고만 판단할 수는 없다. 자신의 주관이 확고해질 때까지 자신의 관점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은 긴 시간이 소요된다. 또 자신의 관점이 옳다는 것을 타인에게 설득하기 위해선 자신도 자신의 논리가 두터워질 근거만을 선택하는 과정을 겪는다. 미술의 영역에서 절대적 정의는 공허하다. 옳고 그름의 영역을 분배하는 명료한 선은 무형의 것이며 즉자적 가치가 되지 않는다. 즉 역사적인 한계와 정의가 뒷받침되어야 시대의 미술이 지향하는 바와 성취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러스킨이 미술(예술가)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모든 예술가가 필요충분조건이라 생각할 수만은 없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 관점을 타인에게 설득하는 과정도 매우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후 자신의 관점을 유지시키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러스킨의 이 사후처리에는 많은 조력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러스킨 자신의 관점이 단단해지는 과정과 이 관점을 옹호하고 지켜나가려는 조력자들의 노력은 똘똘 뭉쳐져 매우 보수적이고 단단한 경계를 만든다. 유연하지 않은 경계는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을 견인한다. 또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해보자. 러스킨은 20대 후반에 11살 연하인 지인의 딸, 에피 그레이(Euphemia Chalmers Gray)와 약혼한다. 말이 약혼이지 사실상 사실혼에 가까웠다. 5년 정도 지나 라파엘 전파의 수장인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강력한 구애를 외면하지 못하고 그를 만나게 되었고, 러스킨은 라파엘 전파를 옹호하는 글을 타임지에 기고한다. 심지어 밀레이의 예술적 후원을 약속하며 그와 함께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기도 했다.

Portrait of John Ruskin_Millais

 그때쯤 밀레이는 에피를 자신의 작품의 모델로 삼았다. 이로 인해 밀레이와 가까워진 에피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여성성과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러스킨을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약혼 파기 소송을 진행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그녀는 밀레이의 성을 가지게 된다. 러스킨이 집착하던 강박이 박살 난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러스킨에 대한 여성 혐오, 소아 성애 등의 확인할 수 없는 흉흉한 소문의 진원지가 되는 지점이다. 그 후 러스킨은 정신병을 앓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자신의 총체적 주장을 담은 글(노동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 포르스 클라비게라(Fors Clavigera: Letters to the Workmen and Laborers of Great Britain)에 노동력의 대가로서 재화를 언급하는 내용으로 휘슬러의 그림을 비평하는 내용을 담아 휘슬러에게 고소를 당한다.



Beguiling of Merlin_Edward Burne-Jones
<휘슬러와 러스킨의 법정 분쟁>

 1877년 휘슬러는 영국인 에드워드 번 존스(Edward Coley Burne-Jones, 1833~1898) 등과 함께 왕립 아카데미의 전시에서 환영받지 못한 미술가들과 함께 그로스베너 갤러리(Grosvenor Gallery)에서 단체전에 출품한다. 라파엘 전파자인 번 존스는 이때 ‘멀린의 현혹(The Beguiling of Merlin)’ 등 7점을 출품한다.

 

 휘슬러에게는 개인전 이후 4년 만의 전시였고 이 전시를 아카데미의 대안 전시라고 이해했다. 이 전시에 휘슬러는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로켓/ Nocturne in Black and Gold – The Falling Rocket(1874)>을 포함하여 8점의 각기 다른 양태의 작품을 전시했다. 이 전시에서 휘슬러의 또 다른 그림은 훗날 자신의 절친이자 시대의 아이콘이 된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flahertie Wills Wilde)의 글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 와일드는 힘없는 젊은이였지만.

 

 당시 영국에서는 터너주의자들을 점점 밀어내고 있는 라파엘 전파자들의 그림이 득세하고 있을 때였다. 이미 1851년에 러스킨의 타임지 기고로 인해 라파엘 전파자들의 명성은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이들은 터너주의자들의 전통을 일부 이어받아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대비 혹은 조화로운 상태로 표현하는 데 애를 썼다. 하지만 휘슬러의 그림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로켓/ Nocturne in Black and Gold – The Falling Rocket(1874)>은 이러한 그림들과 달리 그림 속 주체가 되는 대상이 부재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즉 당시 감상자의 정서로는 이 행위의 목적과 이유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터너주의자들의 그림과 라파엘 전파자들의 그림 모두 그림 속 주제를 부각하는 대상, 인물 등이 그림의 서사를 이끌어 작품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마중물이 되어야 하는데 휘슬러의 그림에는 이것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이것의 부재는 결국 서사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미술작품의 가치 부재로 평가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피사로나 모네와 같이 휘슬러도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로 대변되는 사건과 인물을 벗어나려 했다. 정물은 이미 세잔의 시대에나 미술의 소재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눈을 돌려 미술의 다른 소재인 풍경을 찾아냈다. 터너주의자들도 풍경을 미술의 소재로 소비했었다. 하지만 이 풍경은 서사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매우 계획적이었다. 이에 비해 휘슬러의 이 그림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로켓/ Nocturne in Black and Gold – The Falling Rocket(1874)>은 모네의 풍경화보다 더(모네의 풍경화에는 제목에 선명한 장소, 대상의 정보를 기록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이다. 게다가 제목은 심지어 ‘야상곡’이다. 전통주의자들에게 그림 속에 대상이 부재하다는 것은 물감의 낭비와 다름이 아니었다. 이 지점이 강력한 비판의 중점이었다. 휘슬러는 법정에서 이 부재한 대상의 출처를 밝힌다. 크레몬 정원(cremorne garden)에서 있었던 불꽃놀이와 군중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이다.


  러스킨의 글 포르스 클라비게라(Fors Clavigera: Letters to the Workmen and Laborers of Great Britain) 서문에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임금이 없으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축복받은 것이다. 임금 없이도 인간이 일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그 사회의 뿌리는 썩은 것이다.’ 또 고소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러스킨의 글에서도 번 존스의 그림이 매너리즘과 조악한 부분은 분명히 발견되나 라파엘 전파의 그림이 가진 형식에는 매우 충실하기 때문에 불편하지만 인정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있다. 이와 반대로 휘슬러의 그림에 대한 글은 매우 악의적이다. ‘작품이 미완성이라는 것은 작가 자신과 우리의 욕구에 가장 민감하게 다뤄져야 할 양심의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중략) 그들의 기이한 행각들은 우리에게 거의 매번 강압적이다. 또한 그들의 불완전성을 무례하다고 표현하지 않는다면 도둑심보이다. 나는 지금까지 경솔한 영국인들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대중의 얼굴에 물감 한통을 끼얹은 대가로 200 기니를 요구하는 거만한 사람은 처음 본다’ 러스킨의 이러한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예시로 든 인물이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 티치아노(Titian Vecellio, 1488-1576)다. 아주 거대한 권력을 증거로 내놓으니 당시의 재판정을 구성했던 사람들 모두가 숙연해졌다고 한다. 재판에 소환된 티치아노의 베니스 총독의 초상(Portraitof the Doge Andrea Gritti)은 러스킨이 1864년 1천 파운드의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한 것으로 알려진다.





 시대가 가진 회화의 목적은 변화하기 나름이다. ‘구상(具象)적 행위’는 구상 미술로 발달한다. 구상적 행위는 모양을 온전하게 갖춘다는 행위이다. 물론 이 단어는 추상(抽象)적 행위가 등장한 20세기 이후 추상미술의 다름을 구분하기 위한 신조어이기는 하다. ‘구상적’이라는 영어단어는 ‘figurative’ 다. 이 단어는 ‘not abstract’라고 사전에 쓰여 있다. ‘abstract’는 우리말로 ‘관념’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다시 우리말로 ‘추상’이 된다. 추상이라는 말은 상을 뽑아내거나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아니 상의 내용을 더욱더 응축하고 정제하기 위해 추출하며 상의 속성 중 일부분을 남기고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티치아노의 시대에 구상적인 행위는 전통에 따라 대상이 가진 형의 변화를 꼼꼼하게 쫓는 것에 몰두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이 가진 외곽의 꼭짓점 변화를 철저하게 쫓는 행위를 담보한다. 이 행위가 치밀할수록 시간은 오래 소요되며 완성도는 그 시간의 소요에 비례한다. 티치아노 시대 미완성의 개념은 그 규칙을 따른다. 그 규칙이 구상적 행위의 기틀이 된다. 다시 ‘추상(抽象)적 행위’로 돌아와 보자. 상은 먼저 시각적인 감각에 의해 지각된다. 평면 회화는 그렇게 감각된 시각정보를 감각하여 종합적으로 인식하고 다시 형과 색으로 치환하여 입체가 가진 환영(illusion)을 붓으로 평면에 표현하려 애를 쓴다. 평면회화에서 구상적 행위는 여전히 실재가 아니라 환영으로 표현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추상적 회화를 위한 행위 역시 대상의 환영을 표현하는 데 애를 쓴다. 초기에는 대상이 동기가 되어 대상의 환영을 표현하려 했다. 인상주의 시대가 그렇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잰슨(Horst Woldemar Janson)의 서양미술사에서 인상주의를 설명하는 아름다운 표현이 있었다. 바로 ‘형태를 녹이는 빛’이라는 구다. 자연광에 의해 발생한 색이 사물의 테두리를 대신한다는 신박한 말이었다. 형을 색이 소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주 짧은 목격 순간의 인상은 대상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인상주의자들의 입장이 가득 담긴 표현이다. 온전하게 상을 찾는다는 전통이 형의 맨 바깥이 되는 꼭짓점의 변화를 쫓게 된다면 아무리 환영이라 해도 정교해질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대상이 가진 수없이 미분된 꼭짓점의 개수 전체를 아무리 얇은 붓을 정교하게 활용하여 묘사한다고 하더라도 표현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원본의 환영이 목적이기 때문이다.르네상스 시기를 거쳐 바로크와 로코코를 지나며 단단해진 아카데미의 교육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결과가 정해진 무모한 시도임을 미술가들의 일부는 깨닫게 된다. 즉 모든 회화의 구상적 시도는 정도가 다르겠지만, 태생적으로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조금 가볍게 말하면 인상주의자들은 새로운 가능성의 운동장을 찾은 것이다. 대상이 가진 테두리의 바깥에 대한 연구는 지난하며 또 그 지난함이 가중되어도 그만큼의 결과값으로 보상받기 어렵다. 그 이유는 테두리 바깥의 미분된 꼭짓점의 위치 정보는 점점 더 작은 값을 쫓아야 하고 그 행위 역시 극한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극한의 탐구는 결국 끝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이 행위는 결과적으로 여전히 ‘미완성’ 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티치아노의 시대에서 맛본 회화의 환영을 뛰어넘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하더라도 전혀 새로운 회화적 시도는 아니며 그 결과값도 그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통찰의 결과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미술가들의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하게 한 것이다. 이쯤에서 추상적 행위의 목적도 결과적으로는 구상적 행위의 목적과 동일하다는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상’이라는 개념을 조금 세분화하여 대상이 가진 정서는 상의 온전함만이 아님을 주장하며 그보다 더욱 진하게 상의 정서를 남기려 했다는 부분에서 두 행위의 목적은 일맥상통한다. 다만 이 시대를 지나며 전통을 고수하려는 자와 전통을 벗어나 보하려는 자들의 주장이 상충되는 것일 뿐이다.

 

 이 재판에서 휘슬러는 자신의 야상곡을 크레몬 정원에서 목격한 선, 형, 색의 편곡이라 주장하고 그의 증인 중 한 사람은 이를 ‘원본성(originality)’이라 주장한다. 러스킨의 증인은 그림의 서사를 지시하는 구성과 묘사는 필수적이며 이의 결여는 미술 작품이라 볼 수 없다고 맞선다. 또 러스킨의 변호사는 휘슬러가 행한 이틀간의 노동력으로 200 기니는 과하다고 설득한다. 이에 휘슬러는 이틀을 그리기 위해 평생의 연구가 담보된다고 맞서 박수갈채를 받는다. 이처럼 이들은 상대의 관점을 서로 이해하지 않은 채 재판이 끝나게 된다. 결과는 휘슬러의 승소이지만 법원은 러스킨에게 1 파딩만 배상하라는 선고를 내렸고 재판비용은 각자 지불하라 결정하였다. 이에 휘슬러는 파산했고 러스킨은 명예를 잃는다.

 휘슬러는 이 소송을 기회라 여겼을지 모른다. 또 러스킨은 자신의 불안을 휘슬러에게 화풀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휘슬러의 초기 미술가로서의 행보는 어려웠고, 러스킨은 막힘 없이 성장해 유명인이 되었었다. 이후 휘슬러는 휘슬러의 염원처럼 영국이 아닌 미국과 다른 지역(독일 등 타 유럽국가)에서 미술가로서 큰 존경을 받게 된다. 이후 절친한 친구이자 상징주의자들의 첨병 역할을 하는 시인이며 비평가인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에 의해 프랑스어로 정리된 휘슬러의 강연 ‘Ten O'Clock’이 소개된다. 이 글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이라는 유명한 이론을 통해 존경과 지지를 얻는다. 러스킨에게 향했던 미술가들의 존경과 지지는 철회되고, 이후 젊은 비평가 로저 프라이(Roger Fry, 1866-1934)에 의해 대체된다. 훗날 프라이는 이 재판을 전통과 진보의 대결이라 회상하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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