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항상 변화하려 애쓴다. 이 변화는 특정집단의 의도를 담기도 하지만 의도의 여부와 상관없이 자연스러운 흐름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19세기부터 20세기 프랑스 사회는 급진적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사회 구성원 중 일부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출발한 변화다. 그 의도가 사회 구성원 전체의 필요라 여겨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작위적이라기보다는 변화하려는 힘이 더 크고 거셌다는 표현이 옳겠다. 그것에 영향을 받은 미술도 변화의 양태가 급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혁명을 기점으로 사회가 맞이한 충격, 반향, 공포, 기대에 관련한 모든 값이 급진적이었다. 때문에 그 변화에 몸을 던진 젊은 미술가의 수도 많았다는 것이 이해된다. 수많은 미술가의 시도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미술사회는 역동성을 가지게 된다. 또 수많은 미술적 시도를 넉넉하게 수용할 기득권 세력은 없다. 이 시도와 수용의 과정에서 미술계는 양분된다. 그리고 이미 기득권이라 여길 수 있는 구체제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역사적 흐름에 빨려들 수밖에 없다. 젊은 미술가들의 시도는 어쩌면 당연한 시도였으며 승리가 담보되어 있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리의 진보적인 미술가들은 더욱더 가열찬 변화에 망설임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동성을 기반한 파리의 문화는 타국의 젊은이들이 보았을 때 매우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변화와 진보를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파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시도해도 되는 곳, 그 시도의 자유가 넘치는 곳, 게다가 그 시도의 책임은 크지 않은 곳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넉넉한 책임의 한계를 지닌 시도의 자유가 20세기 미술의 분화된 변화를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기 프랑스 미술의 변화를 하나의 ‘실험군’이라 생각한다면, 같은 시기의 인접한 영국 미술의 흐름을 ‘대조군’이라 볼 수 있다. 이제 이 ‘대조군’을 살펴보려 한다.
이 시기 영국의 미술은 크게 두 흐름을 가지고 있다. 걸출한 풍경화가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의 낭만주의 계보, 탁월한 인물화를 바탕으로 천재라 칭송받은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라파엘 전파 계보다. 이 두 명의 인물은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1837년 6월 20일부터 1901년 1월 22일)의 대표적 화가들이다. 영국은 이미 농업 혁명을 통해 농업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고, 산업혁명의 시기를 지나 대영제국의 시대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사회 전체가 중농주의 보다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제국주의 시대 확보된 생산성을 수입으로 치환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일찍 입헌 군주제로 정치구조 변화를 꾀하면서 딱히 큰 피를 보지 않고도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구축했다. 한마디로 조금 더 풍요로운 경제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는 당시의 영국 문화계 전반에 내려앉는다. 미술도 예외는 아니다. 터너와 밀레이 모두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표준으로 삼는다. 둘 다 영국 왕립 미술원에서 회화를 연구했다. 터너의 1796년의 그림 ‘Fisherman at Sea’를 먼저 살펴보자.
풍랑 위의 어선(Fisherman at Sea, 1796)
터너의 그림을 낭만주의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관념적인 대상을 정밀하게 구체화하여 관념을 구체적 정보로 환원하고 서사를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관념적인 대상(물, 하늘, 구름, 우주 등)을 구체화하는 시도는 매우 어렵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구체적 수용’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구체적 수용은 대상을 보다 많은 지각 체계를 통해 입체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구름이라는 대상을 예로 들어보자. 구름은 보통 사람에게 인식될 때 시각정보만 가진다. 구름을 만지고, 먹고, 냄새 맡고, 구름의 소리를 들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또 구름을 보는 일반인 역시 구름을 미시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대상을 감각하는 데 있어 아주 제한적인 감각을 활용하는 방법만 존재한다. 구체적 표현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지각이 필요한데 이 지각과정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대상을 관념적인 대상이라 칭할 수 있다. 이렇게 규정된 관념적인 대상의 표현은 자연스럽게 관념적 표현을 수반한다. 여기서 관념적 표현은 구체적 표현에 대치되는 일종의 추상적 표현(양식화된 표현)을 의미한다. 터너는 이 관념적 대상을 관념적 표현의 영역에 머물게 두지 않는다. 터너는 먼저 이 대상의 무게, 부피, 밀도 등의 물리적 성격을 세분화하여 최대한의 시각 정보를 인식할 수 있도록 대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물질화’ 시킨다. 이렇게 정한 터너의 규칙을 바탕으로 터너는 구름도, 물도 구체적인 물질로 인식할 수 있는 환영을 기어이 만들어 낸다. 이때 전통적인 물감의 밀도와 두께를 배운 그대로 활용한다. 그리고 전통에서 배운 색(명도)의 대비를 다양하게 캔버스 전체에 위치시킨다. 이 그림의 질서를 만들기 위해 활용한 규칙은 유일한 광원인 ‘달빛’이다. 터너가 이 회화를 완성하기 위해 계획한 과정을 따라가 보자. 먼저 달의 위치 정보를 알리기 위해 화면 중간에 밝은 바다를 배치한다. 그리고 근경에 굽이치는 파도를 위해 어두운 바다를 좌우로 긴 타원으로 배치시키고 거기에 물감의 밀도를 꽉 채운 배(파도, 구름, 하늘을 표현한 물감의 농도보다)를 가둬 위태로움을 최대한 증대시킨다. 배는 주변의 물보다 무거운 물감의 밀도를 통해 곧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서사를 확보한다. 또 배의 앞머리 부분 파도에 달빛의 색을 투과시키며 이 파도가 배와 어떤 각도로 존재하는지 상상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거의 직벽과 가까운 파도의 각도가 느껴진다. 또 파도의 밝은 면들도 어두운 타원의 바다 윗면으로 배치시켜 마치 도넛 모양의 파도 속에 갇힌 배의 위태로움을 더욱 배가 시킨다. 그 밝은 면도 모두 다른 명도를 가지게 한다. 그리고 그 위 바다 새는 뱃사람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배 주변을 아무렇지 않게 서성인다. 게다가 하늘 위 구름의 밀도 변화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달 주변의 구름의 형, 구름의 명도 대비, 게다가 인접한 중경의 구름 사이 빈 하늘은 푸른색 마저 입혀둔다. 그 푸른색의 하늘 아래는 마치 안전하다는 듯이. 먼바다는 더 그렇다. 정말 구석구석 아주 정밀하게 계획된 그림이다. 이 계획의 의도는 아주 선명한 정서의 서사를 전달하는데 충분하다. 터너는 아주 철저하게 아카데미의 교육을 흡수했다.
19세기 영국 문화계 전체를 쥐락펴락했던 비평가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동시대의 미술 분야에서 미술의 기준은 터너여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터너주의자’로 활동한다. 이 터너주의자와 영국의 인상주의 시대를 연 미국인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사이의 재판은 영국의 기존 미적인 가치를 이성적으로 잘 드러나게 했다. 이 재판의 과정과 주요 쟁점이 다음 편 글의 주요한 내용이다. 바로 영국의 인상주의가 어떻게 안착하는지 그리고 그 시대가 가진 미술에 대한 가치와 관점은 무엇이었는지 프랑스의 그것과 비교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당시의 영국 미술계의 주류가 왜 그런 주장을 했는지 이해하기 위해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그림을 살펴보아야 한다.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기원이 된 밀레이는 왕립 미술원에 무려 11살에 입학하는 신동이었다. 이렇게 이름이 붙은 ‘라파엘 전파’의 이유는 기독교적인 도상 속 인물에 대한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 종교의 신화적 서사를 배제하는 과정 때문이다. 이런 밀레이의 그림은 당시 영국의 사회상을 잘 반영한다. 산업의 발달로 인간의 이성이 높은 자존감의 사회상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아직 미성숙한 근대 과학 발전을 위한 탐구와 발명과 같은 행위의 동기로서 미신과 신화 등이 뒤엉켜 공존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코난 도일(Arthur Ignatius Conan Doyle)의 유명한 캐릭터인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첫 번째 장편인 ‘주홍색 연구’가 1887년에 등장했던 것이 그 반증일 수 있겠다. 라파엘 전파의 미술적 특징은 터너의 시대 기준을 철저히 따라 사물과 인물이 가진 물질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라파엘 전파는 역사적이고 자연적인 특성의 사실적 고증에 초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의 그림이었던 ‘성스러운 가족(Christ in the House of His Parents, 1849~1850)이 비판받았던 이유는 밀레이의 관점에서 예수의 어린 시절인 목수의 작업실에 있었을 법한 지극히 인간적인 환경을 고증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단테의 ‘신곡’이 많은 미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었던 사례들처럼 밀레이의 상상력은 쿠르베의 관점처럼 더욱 ‘사실적’이길 바라며 고증에 초점을 두었다. 밀레이의 유명한 그림 오펠리아(Ophelia, 1851–52)를 살펴보자.
오펠리아(Ophelia, 1851–1852)
오펠리아는 신화나 성서 속 인물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장면은 오펠리아가 강에서 익사하기 전 노래를 부르는 순간을 사실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이 비극적인 그림에는 비극을 더해 줄 과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치마 속에 순간적으로 포집된 공기를 물질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 순간의 위태로움을 박제한다. 또 이 순간이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를 오히려 감상자에게 각인한다. 그녀의 표정은 위태로움, 두려움, 기쁨, 용기와 같은 과장된 표정이 아닌 무표정이다. 이 죽음과 대비되는 주변 자연의 생생한 표현은 이 정서를 더욱 고조시킨다. 죽음을 앞에 둔 한 생명체를 둘러싼 생생한 꽃과 나무, 심지어 마지막 오펠리아의 부유를 감싸고 있는 물의 환영마저 매우 생동감 있다. 아직 삶의 경계 위에 있는 수면 위의 표현들은 모두 생생하다. 그녀의 얼굴, 손, 코스튬의 일부는 여전히 주변 자연의 생기와 함께 호흡한다. 다만 방금 전까지 그녀의 손에 들고 있던 화관은 물 위 여기저기에 흩어져 침전하고 있다. 마치 그녀보다 조금 더 먼저 그녀의 예비된 죽음을 암시하듯이. 그리고 화면 좌측 위 작은 산새 한 마리만 그녀의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다. 이렇게 발생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생생한 기록은 터너의 그것과는 또 다른 위기의 환영이 되어 터너만큼 치밀한 밀레이의 미술적 계획이 가진 서사의 정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밀레이 역시 아카데미의 교육을 철저히 실천한다. 다만 과장과 대비 없이 말이다. 밀레이의 이 그림은 마네의 그림처럼 경박한 소재의 차용에 대해 비판받는다. 러스킨 역시도 그 비판 그룹에 껴 있기는 했지만 밀레이의 생생한 표현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그리고 훗날 밀레이의 열광적인 지지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밀레이의 이 그림은 당시 300기니(약 40,000파운드)에 팔렸고, 불과 10년 후 그 두 배를 상회하는 748 기니에 재판매되었다. 영국의 미술계도 조용하지만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밀레이의 시도에 의해 영국의 미술계는 한 발짝 더 인상주의 시대로 침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