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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태와 태만 Nov 06. 2022

도구. 그 좁은 문을 지나면 발견하는 생각의 길(10)

미술에 등장한 물리적 현상과 실험을 통해 증명하려는 미술가들(5)

 15세기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된 아메리카 대륙은 그 이후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도 그 경쟁에 뛰어들어 북미 중 일부를 장악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은 산업에 대한 다른 가치관으로 인해 남 북이 갈렸다. 북부는 기후 때문에 중공업을 기반하여 산업이 번성했고 남부는 온난한 기후 덕에 플랜테이션 농업이 융성했다. 미국은 서쪽과 북쪽으로 영토 확장을 지속하며 북부 지역의 백인 노동자 기반의 공화당과 남부 농민들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으로 나뉘게 되었다. 공화당의 링컨 시대에 갈등은 폭발하고 남과 북으로 나뉘어 전쟁을 했다.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이 나고 링컨은 암살당한다. 다시 전 후 재건을 위해 남과 북이 갈려 농업과 중공업 중 재건의 중심 추를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 노력했다. 다시 공화당의 헤이즈가 선거에서 이기며 남 북부는 타협했다. 이 시기가 19세기 말이다. 이때부터 산업의 발전으로 미국은 강대국이 되었다. 이민자의 왕성한 유입과 기술의 발전으로. 이 시기부터 기업연합(카르텔)이 아니라 기업합동(트러스트)이 등장하고 정치와 문화를 지배한다. 재벌의 출현이다.



 피카소 작품의 구매자이며 판매자이었던 ‘거트루드 스타인’이라는 미국인 여류 소설가에 의해 프랑스의 최신 살롱전의 소식이 미국에 알려진다. 또 파리에서 스스로 '스타인 살롱'을 열기도 했다. 물론 그의 오빠도 몽마르트르에서 생산되었거나, 그 이전의 그림까지도 미국으로 들여오는데 역할을 했다. 보나르, 피카소, 세잔, 르느와르, 도미에, 마티스 심지어 물랑 루주(Moulin Rouge)의 화가 로트렉의 그림까지 미국으로 진출한다. 재화가 풍부했던 미국의 재벌 사회는 그들의 그림을 무차별적으로 사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뉴욕에 전리품 창고와  같은 미술관을 계획한다. 뉴욕의 미술관 들은 유럽 미술의 겉모양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1884년 살롱전에 반감을 가진 미술가들에 의해 프랑스에 독립 미술가 협회가 발족되고 ‘앙데팡당 전(Salon des Indépendant)’을 심사 없이 열었다. 이 상황은 사실 앙시엥 레짐(구체제)의 폐기를 위한 시도 중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 스타인 가문의 파리 미술의 유입 시도로 미국 부(뉴욕, 구 도심의 한 복판)에서 과거 미술과 전혀 다른 신기한 프랑스 미술이 인기를 얻었다. 슈타인을 제외한 미국의 미술품 수집가들은, 산업의 발전으로 사회 전체에 돈이 돌고 있고, 마치 바로크나 로코코 시대처럼 미술품을 수입하며 고급스러운 유흥을 향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욕망은 더 빨리, 더 많이 신 문물인 프랑스의 미술품을 가지려는 행동으로 치환된다. 무분별한 미술품 확보의 노력으로 작품은 가질 수 있지만, 이런 미술 활동을 기반하며 형성된 문화는 가지지 못한다. 이런 신기한 문화가 발생한 이유와 개연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상만 보고 동기와 원인은 모르는 몰이해의 사태가 미국의 미술계에 발생한다. 미국은 애초에 ‘구체제’가 없었다. 시작과 동시에 모든 것을 새로 쌓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방 가르드’를 이해할 필요도, 1차 세계 대전의 트라우마를 겪은 유럽인들이 한없이 약하고 가벼운 전통의 무용을 느끼며 이를 부정하고 싶은 문화 운동이던 ‘다다’를 이해할 필요도 없다. 물론 남북 전쟁 이후 재건이 필요했지만 세계 전쟁을 겪은 유럽 전역만큼은 아니었다. 미국의 산업혁명기를 남북전쟁이 비껴가 여전히 재래식 무기로 싸웠고, 새로 쌓은 것이어서 재건의 의미도 희석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Duchamp, Nude Descending a Staircase


 ‘살롱 전’에서 받아들여졌지만 오히려 ‘앙데팡당 전(salon des indépendants)’에서 거부당한 한 명의 인물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아이러니하게 훗날 다다의 표상이 되어버린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다. 혼돈의 시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던 뒤샹은 파리에서 열린 ‘낙선자 전’과 ‘앙데팡당 전’의 시작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뒤샹이 ‘앙데팡당 전’에서 거부당한 그림은, 뒤샹이 브라크의 이론을 철저하게 받아들인, 무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이다. 당시 입체주의의 광풍 속에 있던 프랑스 독립 미술가 협회는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미래주의에 대해 비슷하지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뒤샹의 이 그림이 미래주의에 치우쳐 있다고 생각해 거부했다. 심지어 자신의 그림을 거부하며 수정을 요구했던 사람은 뒤샹보다 먼저 미술가적 명성을 얻은 뒤샹 자신의 형들이었다. 그리고 그 거부를 거부하고 자신의 그림을 챙겨 나왔다. 뒤샹은 입체주의의 목적과 품이 좁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입체주의 전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그림은 1년 후 ‘Section d' Or(황금 섹션)’_외면받거나, 상처받은 입체 주의자들의 모임인 그들만의 살롱에서 전시해 큰 반향을 얻는다. 뒤샹은 힘을 얻는다. 또다시 1년 후 이 그림은 미국 동부에서 전시되고 커다란 환대를 받는다. 이 경험이 뒤샹의 도미를 결정했다고 혹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결국 미국인이 된다. 뒤샹은 이 그림에서 미래파처럼 시간의 물리적 속성을 미술에 담으려 했다. 비록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만큼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 실험을 통해 물리적 속성을 미술에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왜 꼭 물리적 속성이어야 했을까? 뒤샹이 주목한 부분은 ‘구체제’의 폐기에 대한 당연함뿐만 아니라 뒤샹의 시대에서 가장 진보하고 있는 산업의 발달이다. 그리고 그것을 촉발시킨 것은 물리적 기술의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물리적 기술의 성장은 미래에도 거듭될 것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인류의 새로운 동력이라고 생각했다. 미래주의 선언문에서도 보았듯이 기술 진보를 위한 모든 행위가 다른 모든 행위들보다 상수라는 것이 시대의 배경이었다. 공장제 수공업에서 공장제 기계공업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자비 없이 제품을 양산해내는 생산자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시기 모든 사람들은 생산자이기를 자처했다. 공장의 행태가 변화한다. 바로 주문 후 생산(order-made) 과정이 선 생산 후 판매(ready-made)를 위한 대기 상태인 생산의 행태로 말이다. 이는 생산을 위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이전에는 구매자의 요구에 제품의 결과가 반응하는 구매자 중심의 제품이 생산되었다. 즉 구매자 자체가 생산 행위의 기준이다. 행태가 변화한 이후에는 구매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산자의 합리와 효율에 의해 제품이 생산되는 생산자 중심의 제품이 된다. 산업혁명 이전의 행태는 후원자의 의지가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후원자를 가지고 있는 미술의 시대와 같다. 산업혁명 이후의 행태는 앙시엥 레짐을 폐기하려는 미술가 스스로의 의지가 담기는 시대와 같다는 의미다. 그러니 생산자 중심의 제품 생산 행태가 구체제를 폐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또 생산자의 합리와 효율이 타당함을 시대의 구조주의 철학이 지지한다. 자연스럽게 생산자의 합리와 효율을 위해 생산의 근거인 표준(standard)이 발생한다. 이제 표준이 세상을 지배하는 ‘레디 메이드’의 시대인 것이다. 뒤샹이 브랑쿠시에게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보며 하나의 조각이라 감탄하며, 조각이 이것보다 못하면 안 된다는 비아냥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신물물의 내용적 의미에 의해 인식되는 아름다움에 집단적으로 도취한 시대로의 진입인 것이다. 뒤샹에게 이런 흐름은 당연한 것이고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앙시엥 레짐 속에서 만들어졌던 예술의 의미를 새롭게 명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시작이 시대가 쫓고 있는 물리적 속성을 미술에 넣으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Marcel Duchamp, 1917, Fountain, photograph by Alfred Stieglitz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뒤샹은 미국으로 향한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뒤샹은 프랑스의 독립 미술가 협회를 본떠, 1917년 사진작가 만 레이 등의 미국인들과 미국의 독립 미술가 협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를 만든다. 그리고 초대 전시에 그 유명한 ‘샘’을 출품한다. 물론 뒤샹 스스로가 심사위원이었기 때문에 ‘R. Mutt’라고 소변기에 서명하여.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이 작품은 거부당한다. 그리고 뒤샹은 이사회에서 탈퇴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미국은 추방해야 하는 앙시엥 레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 땅에서 세계 전쟁도 겪지 않았다. 미국인들의 독립 미술, 즉 전 후 미국인들의 ‘다다’ 운동은 뒤샹의 생각만큼 치열하지 않았다. 앙시엥 레짐도 전쟁의 폐허도 없고, 부유한 삶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미국은 유럽에서 붓 좀 잡는다 싶은 미술가들 거의 모두를 불러 모은다. 그리고 스스로 미술 역사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이 시기부터 미국은 유럽의 미술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뒤샹은 구조주의 언어학에 큰 감동을 받았었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각자의 명명(혹은 의미 부여)에 관여하지 않았다. 뒤샹의 ‘레디 메이드’도 뒤샹이 명명하는 순간 의미가 발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뒤샹이 새롭게 아름다움이라 지적한 레디 메이드의 이유를 생각해보자. 앙시엥 레짐 속에서 물려받은 수많은 유산, 그중 명작이라 불리는 예술 작품들. 뒤샹의 생각은 물리적 속성인 시간이 작품에 관여했다면, 그것이 얼마인지 측정하고 계산해 보는 것이다. '샘'으로 명명한 소변기를 예로 들어보자. 누군가 최초 디자인을 고안한 이가 디자인을 위해 고민했던 시간. 이 디자인이 익명의 누군가에 의해 업데이트가 될 것이고 거기에 들인 시간. 또 다른 이에 의해 또 업데이트가 된다면 또 쌓이는 시간들. 또 변기의 소재가 되기 위한 재료를 준비하거나 가공했던 노동자의 시간. 그 재료가 공장으로 운반되는 노동의 시간. 그 재료를 활용해 변기를 만들 때 사용되는 금형 틀을 만드는 노동자의 시간. 공장에서 변기를 만들 때 발생하는 노동의 시간. 라벨을 붙이는 노동자의 시간. 판매점으로 이동하는 역할을 맡은 노동자의 시간. 이처럼 무수하게 많은 익명의 노동자들이 작은 변기를 위해 소모했던 노동 시간의 총합이 앙시엥 레짐에서 만들어진 명작(master piece)에 들인 개별 미술가의 노동 시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물에서 그 시간의 가치를 발견하고, 뒤샹은 그 발견의 순간을 자신의 사인으로 새롭게 명명하고 기념한다. 아직 프랑스인이었던 뒤샹의 ‘오브제(objet)’는 시간이 지나 미국인이 되며 ‘레디 메이드(ready-made)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다다의 표상이 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이후 초현실주의, 누보 리얼리즘, 팝 아트, 플럭서스 그룹 등의 이론적 토대에 영향을 준다. 심지어 포스트 구조주의 시대 들뢰즈에 의해 다시 주목받게 된 플라톤의 용어 ‘시뮬라크르(simulacre)’의 발생에도 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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