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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태와 태만 Oct 18. 2022

도구. 그 좁은 문을 지나면 발견하는 생각의 길.(4)

관점의 차이가 만드는 조각적 결과의 양태 변화.(2)

색이 중요한 조각의 등장.


  1793년 1월 왕이 죽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목이 잘렸다. 프랑스 대혁명은 근대 국가에서 현대 국가의 기틀을 만들었다는 프랑스인들의 거대한 자부심이다. 10년의 혁명 기간 동안 왕을 단두대에 던진 자도 얼마 후 단두대에 던져진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처형했다. 호랑이가 없는 산에 여우가 왕인 것처럼 배신과 암살, 처형이 지속되었다. 혁명의 그늘은 어두웠다. 귀족들과 부르주아는 숨고 농민들은 분노했다. 어떤 혁명이던 혁명 이후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게 되었다는 아주 강력한 두려움이 발생한다. 사회 속 개인에게는 매우 자랑스럽지만 삶을 지속하는 개인의 감정을 위한 실질적인 계획은 없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 사람들의 정서에 들러붙어 시대정신이 된다. 이 혁명 이후 40여 년이 지나 새로운 왕이 태어난다. 이 왕은 훗날 근대 조각의 아버지라 불린다. 바로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이다.



  어찌 보면 혁명을 이끌어 낸 자들은 귀족 자신들이었다.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에 자신들의 욕망을 소비하기 위해 초대했던 시인, 화가, 음악가와 같은 예술가들이 대부분 계몽주의에 동참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 스스로 혁명의 군자금을 계몽주의자들 손에 쥐어 주고 있던 것이다. 혁명의 결과로 얻게 된 죽음 가까이에 있던 예술의 후원자들은 혁명 이후 꼭꼭 숨어버렸다. 후원자들도 미술가들이 얄미웠을 수 있다. 후원자들의 요구에 당연하게 반짝이고 장식적인 그림을 그리며 최대의 표현력을 위한 기술을 연마했고, 또 불안과 빈곤의 시대에 들어서자 그렇게 축적된 기술로 혁명의 낭만을 생생하게 표현하며 대중을 맨 앞에서 선동했으니 말이다. 후원자들이 숨으니 미술가들은 고뇌의 삶을 살아간다. 천사를 그리지 않겠다는 화가도 나타난다. 아름다움이 미술의 소재로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퍽퍽한 민생고나 삶의 외로움이 미술의 소재로 등장하여 자조하기도 한다. 로댕이 조각을 했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적 양태를 풍요가 이끌었다면 로댕의 조각적 양태는 빈곤이 이끈다. 르네상스 조각이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아름다운 인간 형의 표면을 고민했다면, 로댕의 조각은 그와 반대로 최고로 흔한 재료와 최고로 우울한 인간 내면의 형태를 고민했다. 쿠르베가 삶의 묵직한 전진을 표정 없이 표현하려 했다면, 로댕은 살아남은 자의 고민과 불안의 감정을 생생한 표정으로 표현하려 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적 소재는 신을 벗어나 부유해진 인간이다. 또 이와 어울리게 건축에 부속되었던 조각을 건축에서 떼어내어 독립적인 인간의 자긍심이 되도록 조각으로 기록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는 후원의 가치만큼 공을 들인다. 그리고 후원의 가치를 조각에 매진하는 시간과 노력뿐만 아니라 조각가 스스로를 계발하는 시간에도 공을 들인다.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일정한 규범과 형식을 만들고 철저하게 실천한다. 그리고 이 실천의 행위는 시간의 길이만큼 그것을 다듬어야 하는 외곽의 형태를 정교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의 조각은 매우 실천적이며 그 대가가 물리적 형의 변화에 반영된다. 로댕의 조각적 소재 역시 인간이다. 혁명을 기꺼이 이뤄냈지만 처음 가보는 길 위의 불안해진 인간. 똑같은 인간이라는 조각적 소재. 대리석이 아닌 흙. 로댕의 흙에 깊이 있게 다가가 보자.



  30년 전 대학 입시를 치루기 위해 흙을 붙일 때 들었던 좌우 대칭, 해부학적 구조와 같은 말들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그렇게 형의 노예가 된 조각 학도에게는 물리적 형의 변화에만 주목하며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처럼 형의 물리적 완성도에 집착한다. 같은 시험 시간에 남들보다 더 많은 면의 개수를 가진 완성도가 가장 큰 미덕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의 난 르네상스의 조각보다 로댕의 조각이 더 좋았다. 그 당시에 왜인지는 몰랐다. 그걸 이해하게 된 것은 20대 후반이 되어서이다. 1990년 이자벨 아자니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19금(당시의 기준) VHS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빌렸다.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영화다. 조각을 전공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조각에 대한 관심으로 이 영화를 택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는 예상대로 재미있었다. 세 번을 돌려 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있었다. 까미유 끌로델과 로댕이 서로 친숙해졌고, 사랑의 감정이 한창일 때 로댕이 까미유 끌로델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 지점이 참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다. 맥락도 없이 갑자기. 까미유 끌로델이 로댕의 얼굴을 양손으로 만진다. 눈을 감고 사랑스럽게. 로댕은 좋아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로댕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양손으로 까미유 끌로델을 밀어낸다. 그 장면 이후 로댕은 까미유 끌로델과 멀어지려 애쓴다. 그 장면이 결정적인 장면임을 이해한 건 로댕의 조각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고 나서였다.



 로댕의 관점_ 형이 색으로 분화하는 과정.



 특별할 것 없는 로댕의 흙. 로댕의 조각이 특별해지려면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적 관점에서 벗어나야 했다. 로댕이 그러기 위해 주목했던 것은 뼈와 피부와의 간극이다. 그 미시적 간극에 의해 발생하는 질감의 차이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손가락을 쫙 펴 손등을 바라보라. 피부의 표정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에는 주먹을 있는 힘껏 꽉 쥐고 손등을 바라보라. 피부의 표정 변화가 느껴질 것이다.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경질인 뼈. 그 뼈가 피부와 가까워지면 피부의 질감이 변화한다. 그리고 로댕은 이를 흙으로 구성하는 조각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로댕에게 이제 르네상스 조각의 관점인 물리적인 형의 변화는 폐기된다. 그 흔한 좌우 대칭도 중요하지 않다. 흙은 예민한 질감의 대비를 가지게 된다. 꾹꾹 눌러 담기도 하고, 빠른 속도로 쭉쭉 밀어 내기도 한다. 형의 변화에 예민해야 하는 부분은 인체에서 돌출한 산 부분이고 인체에서 안으로 들어간 골짜기 부분은 정교하지 않아도 된다. 질감은 조각의 재료 중 형의 재료가 아니다. 질감은 색의 재료다. 조각에서 형의 재료보다 색의 재료에 신경을 쓰니 훗날 20세기 미술의 관점과 가깝게 된다. 회화는 입체적이길 바라고 입체는 회화적이길 바라는 시대와 말이다. 바로 이 질감의 대비로 조각에 생동감이 발생한다. ‘감’이란 물리적인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조각의 바깥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느낌이나 생각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부 지향적인 정서적 단어이다. 로댕의 생동감에 대한 연구 이후 조각은 적극적으로 정서를 담을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또 로댕의 조각은 인상주의 시대보다 앞서 형을 소거하고 있다. 로댕에 의해 조각의 양태가 변모했다. 시각적 조각에서 촉각적 조각으로 말이다. 질감의 변화를 인지하는 것은 시각보다 촉각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흙의 최종 상태는 석고나 청동으로 남는다. 결과적 상태는 만져봐야 똑같은 질감을 가지지만 아이러니하게 시각적 대비에 의해 그 질감을 촉각적이라고 인지하게 된다. 결국 조각가의 관점에 따라 조각의 목적이 설정되고 그 목적에 따라 표현이 실행된다. 그리고 조각이라는 넓은 틀 안에서는 같은 범주이지만 결과적인 양태는 이전과 다르게 분화한다.

  


 까미유 끌로델을 밀어낸 로댕과 이후의 관계 변화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로댕은 불안의 시기에 태어나 불안의 포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까미유 끌로델이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인지하는 촉각적 행위는 까미유 끌로델이 로댕의 조각을 선명하게 이해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었다. 로댕은 로댕의 모든 것이었던 촉각적 조각을 그녀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에 공포스러워하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빈곤과 불안의 시대 환경에 의해 로댕은 폐쇄적인 행동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거장의 까탈스러운 뒷면을 느끼며, 매우 질한 모습이지만 인간적이라 느꼈다. 마치 혁명의 그늘처럼. 20대 후반에야 이해하게 된 영화의 한 장면을 통해, 영화감독이 이해하고 있는 로댕의 조각을 나는 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어 사물의 깊이를 고민하는 버릇이 생겼다. 난 규범에 취약하며 사회성이 뛰어나지 않고 로댕만큼 폐쇄적이다. 그래서 로댕의 조각이 더 좋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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