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의 차이가 만드는 조각적 결과의 양태 변화.(1)
형을 위한 미술의 발생에 대하여.
사라졌던 조각가(미술가)들이 풍요로운 피렌체 지역으로 입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새로운 후원자와 함께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다. 이 예술가들이 르네상스의 고유명사인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 시대 속 익명의 노동자들이 실질적인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사라졌던 산업을 재화로 부활시키는 역할의 상인, 역사에 이름을 남긴 조각가뿐만 아니라 산업 종사자들의 위대한 헌신이 이 시대를 더욱 반짝이게 했다. 대리석을 채굴하는 까라라 광산은 직선거리로 피렌체에서 무려 100km 나 떨어져 있다. 대리석을 채굴하는 광산 노동자와 그 인근의 지역 사람들도 새 삶을 얻었고, 이 대리석을 운반하는 노동자들과 운반 경로의 지역 사람들도 새 삶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조각가는 말할 것도 없이 조각가를 돕는 석공들도 새 삶을 맞이하게 되었다. 또 이 시대 석공과 조각가를 위한 장비를 제작하는 노동자들도 새 삶을 얻었으며, 경제 공동체인 그들 모두의 가족들도 새 삶을 얻게 되었다. 교회가 후원하던 미술이 후원을 그만두며 멈춰있던 산업이 다시 활기를 찾으며 노동자들은 그 시대 이 대리석이 신의 현신이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산업을 다시 열게 한 상인들에게도 당연하게 감사했으리라. 또 그들의 새 삶을 화려하게 조각할 조각가들에게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경제력을 선물한 대리석은 매우 귀중한 사물이 되었다. 이 귀중한 사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곧 시대정신이 되었고 이 시대정신은 예술가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미술(조형)의 형식적 재료는 크게 형과 색으로 나뉜다. 형 속에는 가장 넓은 범위의 재료이고 입체와 입체의 서열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간, 면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발생하는 입체, 면이 존재할 수 있도록 구획을 만드는 선, 선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점이 있다. 미술가는 이 다섯 가지 재료의 변화를 활용하여 형의 변화를 추적하고 형을 구현한다. 색 속에는 보편적이고 고유한 관념을 제공하기 위한 색상, 색의 밝기를 지시하는 명도, 빛의 무지개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의 색을 분류하는 기준이며 맑고 탁함의 기준이 되는 채도, 미술의 직접적인 소재(사람, 사물 등)가 가진 고유한 표면의 질감, 인상주의 이후에 발생한 미술가에 의해 설계되는 변화 혹은 창조된 미술가가 부여한 내재적 질감 이렇게 다섯 가지 재료들의 변화를 섞어 작품의 색을 결정한다. 한낮 돌일 뿐인데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대정신이 숭고해지니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 역시 돌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그 시대정신을 담아내기 위해 예술가가 선택한 숭고함은 바로 미분된 형에 대한 추적이다. 아주 미세한 형의 변화를 끝까지 추적하는 방법을 고안하며 그 변화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방법을 고민하며 소중한 대리석의 불필요한 유실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아주 얇은 코스튬의 두께가 만들어 낸 매우 작은 점의 변화까지도 충실하게 찾아내기 위해 어떤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지 고민했으며 이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다. 매우 작은 점의 변화를 찾으려는 시도는 점뿐만 아니라 선, 면, 입체, 공간의 더 많은 변화를 양성하게 된다. 점의 개수가 많아진다는 것은 점으로 이루어진 선, 면의 개수를 증가시킨다는 것이고 결국 조각이 가진 표면적의 외부 넓이가 무한하게 증식한다는 의미가 된다. 표면적이 증식하는 것은 조각의 경계가 공간과 만날 때 더 많은 변화에 의해 감상의 치밀함이 발생한다는 의미와 준한다. 그리고 그걸 우리는 정교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이 정밀한 작업을 위해 1/3 크기의 모형, 2/3 크기의 모형 그리고 실크기의 조각까지 세 번의 작업을 거친다. 모형이라고 허투루 다루는 법이 없다. 그 모형의 형에서 2/3 크기, 실제 크기까지 그대로 확대 복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앞다투어 인체 해부학에 몰두했다. 더욱 더 정교한 형을 드러내기 위해서 변화하는 외부의 꼭지점뿐만 아니라 내부의 구조에 의해 발생하는 형의 변화에도 주목한다. 그 결과물은 당연하게도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감상은 바로 형의 정교함을 구현했다는 것, 그 정교함의 끝을 알 수는 없지만 그 시대 최대한의 기술을 발휘하여 물리적으로 표현하려는 형을 구현했다는 것은 매우 위대한 일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미술 해부학 서적은 척추에서부터 시작한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관절의 구동 범위와 각도 방향 등을 상세하게 기록해 둔다. 지금도 이탈리아의 조각 학도들은 대학에서 저 과정을 당연하게 가르치고 배운다. 가장 찬란했던 시대의 미적 표현 양태가 교육의 현장에 기어이 눌러앉는다. 심지어 흙으로 작업하는 조각가들도 저 공정을 고스란히 따라 작업해 나가도록 지도한다.
관점이 담긴 관찰은 지각의 과정에 관여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관념은 인식이 된다. 당연하게 인식의 주체가 관찰한 내용이 작품에 담기고 작품은 그 인식이 시키는 대로 결과적인 작품의 지향점을 찾아간다. 사실 우리에게 ‘본다’와 같은 지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타인의 감각으로 1초도 살아보지 못했으니 내 감각은 오로지 나의 감각이다. 그렇게 느낀 감각은 나만의 지각이 되고 인식이 된다. 따라서 보편적인 감각과 인식의 존재는 실재하는 것이라기보다 관념 쪽에 철썩 붙어있다. 그리고 내 관념이 옳다고 타인에게 주장하는 셈이다. 어떤 것이던 감각에서부터 출발한 창작 활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관찰 이전에 이미 공공적 관점이 존재한다면 관찰도 개인적이라 할 수 없다. 관찰의 방법을 기준화하는 과정과 그것의 기록 방법, 그 결과물에 대한 보편을 강제한다면 그 내용은 개인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 창작 활동은 개인적이기보다 여러 인식들의 집합체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은 아니다. 선택일 뿐.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적인 양태는 크게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