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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태와 태만 Aug 23. 2023

도구. 그 좁은 문을 지나면 발견하는 생각의 길.(2)

어찌보면 삶의 원리가 모든 조형의 원리

 도구 제작 과정의 신중함.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재료, 가공할 수 있는 최대의 이성과 기술이 집약된 이 행위가 도구에 담긴다. 그리고 이 행동에 담긴 신중함이 대대로 이어져 인류가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조형활동의 근간이 되었다. 책으로 배운 조형원리 중 첫 번째는 ‘통일성’이었다. 한글로 번역된 이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의무교육의 기간보다 길었다. 내 어린 시절의 통일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때만 쓰였기 때문이다. 

 ‘unity’의 사전적인 의미를 피상적으로 인지하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위적 원리이다. 수많은 인간들의 행위와 행위의 목적을 성찰하지 못하면 이 ‘통일성’의 필요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을 통해 내가 얻은 ‘통일성’의 의미는 힘을 획득하기 위한 행위 원리이다. 즉 우리가 도구를 제작하는 행위(조형)는 힘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담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힘은 광범위하다. 인간이 피식자에서 포식자로 변환하기 위해 시도하는 모든 행동들이 이 힘을 위해서다. 더 유용한 수렵을 위해 인간들은 연합했다. 하나보단 둘이, 둘보다는 넷이 더 큰 힘을 가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으며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런 사회가 더 큰 힘을 가지기 위해 국가로 확대되었고, 이 국가의 수명이 연장되길 바랐고, 힘이 닿는 영토가 확장되길 바랐다. 또 이러한 힘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길 바라며 규칙과 규범을 만들어 반복적 행위를 용이하게 했다. 이렇게 확대, 확장, 연합, 연장, 반복과 같은 행위들이 통일성을 수식한다. 그리고 단일 개체의 이러한 개별적 행위들도 이와 같은 맥락을 가진다. 정치, 기업, 종교 등 모든 개별 사회가 이 같은 행위들을 통해 각자의 목적에 걸맞은 힘을 획득하려 한다. 호모 하빌리스의 도구와 현대인의 도구는 긴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다. 인간이 도구를 만드는 가장 큰 목적은 결핍된 힘을 충족시키려는 욕망과 닿아있다. 결핍이 크다고 생각할수록 이를 극복할 충족 행위는 더 신중해진다. 주변 포식자의 힘이 더 클수록 상대적 결핍은 더 크게 발생한다. 불안도 커지고 그에 대한 대응인 더 유용한 도구 개발 욕망도 같이 커지고 발전한다.


 ‘unity’의 목적이 힘의 획득이었다면 ‘균형성’이라 배운 ‘balance’의 의미는 안정성의 확보에 있다. 우리의 도구 중 반드시 안정성을 담보해야 하는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의식이 없는 때 나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주거를 위한 도구, 생존의 직접적인 에너지 공급을 위해 필요한 행위를 가능케 하는 그 재료의 선택도 넓은 의미의 행위를 위한 도구, 포식자의 날카로운 발톱과 공격에서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의복과 같은 도구를 제작할 때도 그러하다. 주거를 위한 도구는 중력이라는 거대한 힘, 기후와 지형 등을 거스를 수 없고 다른 침입자의 침입을 제한할 필요도 충족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한 기술이 확보되지 않았다면 그 형과 재료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형과 재료가 단순하다는 것은 도구의 목적도 매우 단순하다는 것이다. 안전의 확보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담기엔 이런 도구의 변용 가능한 품은 좁다. 식재료를 선택할 때도 동료의 죽음이 담보되어 있다. 채집을 한 재료, 수렵을 통해 얻은 재료도 그 처음은 안전하지 않다. 그 재료의 위험한 특이성은 누군가의 선행된 죽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개인의 경험이 집단의 경험이 될 때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누군가는 익명으로 위험한 우연을 실험했어야 했다. 그런 익명의 무수한 실험이 지역의 기후와 맞닥뜨려져 밀, 쌀, 옥수수와 같은 탄수화물 공급원이 되었다.

의복 또한 기후와 지형, 삶의 행태와 매우 밀접하다. 의복은 인간의 삶이 세분화되고 행위의 목적이 선명해질 때마다 다른 형태가 된다. 초기 인류의 수렵과 채집을 위한 의복은 다른 구분이 없었다. 위험의 상수에 따라 개인의 의복은 더 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었다. 신체를 보호하는 의복의 중의적 의미가 발생하는 지점은 아마도 부족 국가가 발생하고 개인마다 역할 구분이 발생하는 시점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처음도 역시 개인의 생존과 안녕을 위한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이렇게 삶의 안정성을 위한 도구를 개발하려는 인류와 그 기원을 상상하면, 지금과 같은 시기에 완벽한 포식자로서 존재하는 한 인간인 내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이 발생한다. 그들의 불안과 위험의 크기를 나라면 감당할 수 있었을지, 그것을 감내한 과감한 결단과 행위를 나라면 당연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 고민한다. 그러다가 과연 그들이 지금 내 고민과 같은 인식을 가질 여유는 있었을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지금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겠다는 결론과 함께.


 힘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도,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도 하나의 형태일 수는 없다. 도구가 가진 각각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 각각의 목적에 알맞게 도구의 형태를 변화시켜 제작해야 한다는 원리가 내가 ‘변화성(변화)’이라고 배운 ‘variety’이다. 70년 대에 태어나서 8~90년대 초반 의무 교육을 받았던 내가 21세기에는 너무 당연한 ‘다양성’이라고 왜 해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화를 낼 수는 없다. 나는 우리나라 근대화를 막 벗어날 시점에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에게 다양성은 품을 수 없는 주머니 속 송곳과 같은 위험한 주제이고 일반인은 차마 입 밖으로 내기 두려운 말이기 때문이다. 아주 커다란 엄니와 송곳과 같은 발톱을 가진 5m 크기의 고양이과 동물과 대치할 때 사용할 도구와 냇가에서 20cm짜리 어류를 잡아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의 도구는 같은 성질의 행위를 위한 도구이지만 같은 형태, 크기, 재료 일 수는 없다. 목적에 알맞은 각각의 도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원리가 다양한 도구의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공격적인 힘을 획득하기 위한 도구 제작의 원리, 생존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도구 제작을 위한 원리 이 두 가지의 원리만으로는 역사에 존재하는 인간 삶 전체를 위한 도구를 제작할 수 없다. 도구는 다양한 인간의 삶을 기반하여 치밀하게 진화해야 했고, 또 실제로 진화했으며 그 진화의 필요를 다양성의 원리가 제공한다. 이런 원리들이 인간의 삶에 끈끈하게 관여하며 아주 긴 시간 동안 조형 활동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그를 통해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바라는 감상의 기준이 마련된다. 바로 ‘숭고미’라 불리는 아름다움이 그러하다. 이것에 의해 예술가는 자신이 가진 최선의 공력, 지식을 바탕으로 긴 시간 조형활동에 매진해야 하는 사회적 필연성이 발생한다. 이 다양성의 원리는 인간을 위한 도구의 진화를 위해 필수적인 원리이지만 반대로 인간에게 매우 잔인한 도구를 만드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 역사 속 전쟁 상황에서 이는 자주 목격된다. 철기 문화권에 들어선 히타이트 부족의 유럽 남하 과정이 그랬고, 16세기 스페인의 철제 무기가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을 짓밟을 때도 그랬고, 20세기 두 번의 세계 전쟁에서도 그러했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크게 각성한 생산자를 위한 합리성과 효율성만을 위한 시대의 도구 제작 목적이 무기를 생산하는 기반 원리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보라. 무기를 제작하는 생산자에게 합리와 효율은 한 번에 가급적이면 많은 살상이 가능해야 한다는 간단한 목적이 정해진다. 그리고 이는 성공했다. 1차 세계 대전에서는 죽거나 실종된 이가 1,800만 명,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사망자만 7,300만 명 이상이라 집계되었다. 파괴된 인류가 얻은 예상하지 못한 상실과 우울의 영수증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 있다.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도구의 진화는 인간을 지구에서 가장 완벽한 최상위 포식자로 만들었지만, 인류를 지구에서 지구와 함께 지울 수 있는 위험한 가능성도 만들었다. 번영의 시대에 들어선 현재에 각 개인은 재화의 충족만이 행복의 완벽한 척도라는 데카당스적 사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인류의 현시대정신이 옳은 방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인류의 경제 관념에서 화폐는 지폐가, 지폐는 신용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것이 인류 경제의 당연한 관념이 되었다. 이 관념이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에 난 의문을 가진다. 초기 인류의 도구는 생존이 목적이었고, 이 생존의 범위가 안녕을 넘어 이데올로기와 같은 집단 최면의 시대를 지나 눈덩이처럼 굴러 과잉 된 번영의 당연함을 받아 들이는 시대가 된 것처럼 예술도 변화해왔다. 조형 미술이 목적하는 관점도 시대에 따라 변화했고 그 지점은 무엇 때문이었으며 그 결과는 어땠는지를 들여다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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