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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태와 태만 Oct 13. 2022

도구. 그 좁은 문을 지나면 발견하는 생각의 길.(1)

손에 대하여

 기후위기. 기후 복원의 탄성력이 사라지는 한계점까지 지구의 평균온도가 올라가는 건 시간문제라는 말이었다. 또 지금의 기후위기는 5~60년 전 가속된 산업화의 영수증이라고 한다. 문득 기후에 기반한 인류의 문명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6,000여 년의 기록된 역사가 참 별스럽지 않다고 느껴졌다.

 

 조각을 전공한 나는 항상 미술 조형의 기원을 고민했었다. 그 고민의 끝에 최초의 도구 개발자가 궁금해졌고 나름의 상상력으로 그 시대를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나름의 상상력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50년도 못 산 현대의 인간 주제에 200만 년 전이라 알려진 ‘호모 하빌리스’의 삶을 통찰하려는 시도가 어리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금했다. 도구를 대했던 인류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지.

 

 아직 네 발로 운동하던 그들은 작은 몸집에 힘도 세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보다 어떤 식으로든 생존의 우위에 있는 우월한 운동능력의 포식자들이 그들 주변에 산재해 있었을 것이며, 그들은 항상 불안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인간의 불안은 매우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 불안의 깊이는 그들과 지금의 내가 느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되었다. 나도 그들도 삶의 안녕과 생존을 위해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불안의 동기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그때는 종이 다른 포식자로부터였다면, 지금은 같은 종의 포식자들로부터라는 것일 뿐이다. 불안하다는 인간의 기저 감정이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동질감으로 묘한 안정감을 얻었다.


 도구의 역사는 손이 앞발의 역할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먼저 손등과 손바닥의 가로 단면을 보자. 손가락으로 향하는 중심각에서 손가락 끝을 연결하면 호의 형태가 된다. 손의 역동성은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손등은 볼록해지고, 손바닥은 오목해진다. 그리고 쫙 편 손의 손가락은 손목의 어느 한 점에서부터 발산하듯 벌어진다. 게다가 손등과 맞닿아 있는 각 손가락에 위치한 손톱의 세로 중심을 연결하면 손등을 따라 볼록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 엄지손톱과 중지 손톱 중심 진행방향의 각도 차이는 75도에서 85도 정도이다. 그 반대의 손바닥에서부터 이어진 손가락 지문 쪽의 중심들은 오목한 손바닥을 따라 역시 수렴하는 각도가 만들어진다. 손가락을 손바닥 안으로 접으면 또다시 다채로운 면의 변화와 마주하게 된다. 엄지 손가락은 나머지 네 손가락과 거의 직교하듯 접히며 손 등에서 시작한 나머지 네 손가락의 첫마디들을 연결한 면은 바깥으로 발산하는 둥근 호가 발생하고, 두 번째 마디는 평평한 면을 만들고, 세 번째 마디는 첫 번째 마디와 정확하게 대각을 이루게 되어 손톱이 있는 마디는 오목한 호를 만들어 낸다. 손가락은 모두 다섯 개, 각 마디의 합은 열 넷이다. 각각의 모든 관절이 자유로운 움직임을 가지지는 않지만 독자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다양한 변화에 의한 표정을 만들 수 있다. 또 손가락의 뼈와 연결된 인대는 손등을 타고 손목 7개의 뼈를 지나 아래 팔의 노 뼈(팔 바깥쪽의 손목 부분이 굵은 뼈)를 감싸는 근육이 되고 위 팔인 상완 골의 아래쪽 소골 두까지 연결되어 있다. 아래팔은 위 팔인 상완 골에 두 개의 뼈(노 뼈<손목과 엄지 방향이 두꺼운 팔 바깥 족 뼈>, 자 뼈<팔꿈치와 아래팔 안쪽이 두꺼운 팔 안쪽 뼈>)로 연결되어 손의 회전운동을 가능케 한다. 손의 회전운동에 따라 팔의 근육은 마치 빨래를 짤 때처럼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손에 대한 관찰에 대해 길게 서술한 이유는 이 다채로운 움직임이 하나의 행동 목적을 가진다는 것 때문이다.


 바로 ‘잡는’ 것. 손바닥의 중심보다 둘레가 돌출되었다는 것과 손바닥의 한 점으로 수렴하는 듯한 손가락의 움직임은 모두 이 잡는 행위를 위해 발달했다는 것이다. 도구의 역사는 바로 이 잡는 행위에서부터 출발한다.

다시 ‘호모 하빌리스’의 얘기로 돌아온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뇌 용량이 1,600cc라면 호모 하빌리스의 뇌 용량은 절반도 되지 않는 600cc라 한다. 뇌에서 공포 인식을 담당하는 기관은 직경 2cm의 편도체이다. 아직 생각의 크기가 크지 않은 호모 하빌리스의 경우에 이 편도체의 크기가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뇌 전체가 담당하는 역할의 단 10%만 알고 있는 현재 인류에게, 그리고 그것을 어깨너머로 이해하고 있는 내가 알아낼 수 없는 질문의 답일지도 모른다. 다만 인체 해부학을 연구하며 경외심을 느꼈던 내 짧은 인식에 의하면 자주 활용하는 기관은 더 발달한다 판단했다. 주변의 수많은 포식자들에 의한 나약한 죽음으로 인한 공포의 반복은 어쩌면 이에 대한 장기기억을 위해 더 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앞으로 손이 될 앞발을 활용해 무의식적으로 생존을 예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행위들은 매우 숭고한 일일 수도 있다. 오늘을 살아남아 내일을 예비하는 반복된 날의 수만큼 더 많은 긍정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유하게 되고 이 행위들이 대뇌 피질에 쌓여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강박적인 반복을 현재까지 거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거듭되는 집단적인 행위들로 도구의 발전도 거듭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현대인들이 불안을 느끼면 하는 각자의 습관적 행동들이 호모 하빌리스의 DNA적인 유산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처음의 도구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바로 앞의 생의 연명을 위해 그릇과 같은 도구를 만들었을 것이다. 도구가 인간의 결핍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아마도 꽤 시간이 지나서였을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종이라 상정하면 적어도 40만 년은 지나야 한다. 수렵이 시작된 이후 수렵과 같은 공격적 행위 도구로서의 가능성을 깨닫고 이 도구가 인간이 가지지 못한 외적 결핍을 소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을 것이다. 처음의 수렵은 모험이었을 것이다. 수렵행위도 인간보다 작은 동물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며 이 행위는 점차 담대해졌을 것이다. 이때부터 수렵의 도구는 인간의 나약한 힘을 대신한다. 수렵행위는 매번 성공을 담보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희생이 뒤따랐을 것이다. 희생의 상태는 사상이었을 것이고, 그 상태는 다른 개체들에게 목격되었을 것이다. 같은 종의 죽음, 사지가 뜯기고 내장이 파헤쳐져 먹이가 되어버린 그 상태를 목격한 다른 개체들은 그 공포를 편도체에 각인하였을 것이고 그 공포는 도구를 제작하는 행위에 충분히 담겨 신중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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