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엄마도 엄마 하면서 운다>에 부쳐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질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박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중에서
“고아의식”이란 말을 좋아했다. 그것을 처음 알게 된 건 배수아 소설을 통해서였다. 90년 대 이전의 한국문학이 국가나 사회적 아슈에 촛점을 맞췄다면 그 이후부터는 점차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그늘이나 가족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반해 배수아는 철저히 자아를 고립시키며 저항이 아닌 단절의 방식으로 새로운 사유와 존재 양식의 탄생을 알렸다.
김미정 문학평론가는 배수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을 ‘자발적 고아’로, 한유주와 김애란의 것을 “태생적 고아’로 명명하며 “80년대 권위의식을 경험한 90년대 작가들이 보편적 진리의 아버지, (국가 또는 사회)를 애증한다면 2000년대 작가들은 (태어날 때부터 위계질서에 대한 경험이 없으므로) 애초 현재의 적대구조를 의식하지 않고 부유하듯 살아간다” 고 평했다.
70년대 초반에 태어나 90년대 학번이며 전형적인 아스팔트 키드인 나는 이편도 저편도 아닌, ‘낀 세대’라는 자각이 있었다. 전쟁, 운동권, 민주화, 경제발전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은 없지만 그 상흔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고아의식’은 국가, 만족, 혈통에서 해방된 주체성, 자율성, 독창성을 담보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말에 매혹되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고아의식’으로 산다는 것과
‘고아가 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다르다.
그때는 ‘고아’가 지닌 깊은 상실까진 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과거는 상실이 아니라 허물처럼 벗어내야 하는 유물로 여겼고 실질적인 고독과 우울까진 체감할 수 없었으니까. 시인 박연준은 산문집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에서 존 버거의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를 언급했다.
존 버거는 ‘고아’에 대해 말한다. 어릴 적부터 왠지 모르게 고아의 기분을 느껴왔다고, 부모님이 다 계신데도 그랬다고 말한다. 나도 그랬다.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고아는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그와 함께 어떤 특별한 기술도 익히게 된다. 그는 혼자 살아가는 프리랜서가 된다.”
나는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는 법’을 ‘체념으로 고쳐 읽는다. 고아인 우리는 체념을 배우고 고독하나 외로움을 타지 않는 법을 배우면서 어른이 된다. 아니, 어른을 흉내 낼 줄 알게 된다. 고아는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섣불리 품는 희망은 삶 전체에 독을 퍼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아는 희망이 두려워 괜찮은 척, 밝은 척,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산다.
박연준 산문집,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중에서
나는 이 글을 ‘고아의식’과 ‘고아’ 중간쯤으로 읽었다. 고아가 아닌 사람도 고아의식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진짜 고아가 되고나면 ‘고아가 아니었을 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속에 빈 자리를 품게 됨으로써 체념, 고독, 우울이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건 대체불가능한 것이리라. 다만 기대지 않아야 쓰러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세상의 모든 고아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어른 흉내를 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아버지를 잃고 빈 자리를 어찌해야할지 몰라하던 때가 있었다. 슬픔은 폭우처럼 쏟아지다가 거짓말처럼 그치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것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운동도 하고 글도 쓰고 드라마나 영화도 보고 사람들도 만나면서 점차 평정을 되찾아 갔다. 적어도 그런 듯이 보였다. 하지만 땀을 흘리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정신없이 웃거나 길을 걷다가도 문득문득 우울과 마주쳤다.
그때마다 울진 않았지만 그 상실의 기억은 잊혀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느꼈던 예민함과 두려움이 가라앉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외면하려고 했던 것 같다. 어서 지나가기를… 그건 보호본능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을 보호해야했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고 느꼈다. 생로병사는 누구나 겪는 일이기에 내 슬픔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주문처럼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렇다. 누구나 겪는 일이기에 부고는 간간히 들려왔다. 그럴만한 나이가 된 것이다.
나는 장례식장에 들어설 때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또각또각, 허리를 곧추 세웠지만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은 상주를 마주하는 순간 어김없이 무너졌다. 애도의 시간이 더 필요한 거라고 변명하진 않겠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나는 그럴 것이다. 마음이 무너지고 눈물이 날 것이다. 괜찮은 척 살다가 괜찮지 않은 날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엄마가 와할머니 산소에서 “엄마”하면서 울었던 적이 있었다. 별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쩌면 나도 그럴지 모르겠다. 그리움에는 이유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상처를 드러내고 눈물을 보이는 것이 미숙하고 어린아이 같은 것이 아니라 진정한 어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혼자인 내가 혼자인 다른 이에게 슬픔을 슬픔으로 안아줄 수 있다면, 그때만큼은 어른이 아니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시인 박연주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각각 “혼자 살아가는 프리랜서”이니 말이다.
나는 장례식장에 찾아와준 친구들을 잊지 못한다. 정작 그때는 울지 못하던 나를 대신하여 눈물을 흘려준 친구도 있었다. 동창회처럼 웃고 떠들고 술을 마셔도 좋았다. 곁을 지켜준 것만으로도 힘이 됐으니까.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빈 자리는 상실이나 슬픔이 아니라 안식처가 되어줄 거라고, 오늘도 나는 나를 다독였다.
나도 그랬다.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