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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집사 Jul 01. 2024

Ep 23 눈꽃처럼 눈부신

커다란 그릇에 담긴 비극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주는 것이 최고다. 한 번에 그릇을 통째로 달라고 요구하는 환자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는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리 부부는 예후를 묻지 않았다. — 이후 며칠 동안 나는 그들과 상세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 이건 마라톤의 첫걸음이나 마찬가지고, 푹 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방금 내가 한 말을 전부 기억하지 않아도 된가고, 다시 한번 모든 사항을 짚고 넘어갈 거라고 말했다.


나는 환자의 뇌를 수술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정체성, 가치관, 무엇이 그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지, 또 얼마나 망가져야 삶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수술에 성공하려는 헌신적인 노력에는 큰 대가가 따랐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실패는 참기 힘든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부담감은 의학을 신성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영역으로 만든다. 의사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려다가 때로는 그 무게를 못 이여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숨결이 바람 될 때] 주인공 폴이 환자들에게 하는 말  



거의 20년 만에 마주한 것 같다. 이토록 책에 푹 빠져서 다음 내용이 궁금해 미치겠고, 다른 일을 손에 잡고 있어도 머릿속은 온통 그 책 속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적이.


맞벌이로 바쁘셨던 부모님이지만 항상 집에 가면 책장에 한가득 책이 쌓여 있을 정도로 부모님은 과학, 예술, 에세이를 불문하고 다양한 분야의 도서 전집을 항상 사주셨다. 덕분에 나는 일찍이 어릴 적부터 책에 익숙한 아이였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서도 항상 ‘다독왕상’ (지금 생각해 보니 상 이름이 너무 노골적이라 귀엽다.)을 놓치지 않을 만큼 책을 많이 읽는 아이로 자라왔다.


집에서는 부모님께서 마련해 주신 책을 보았고, 학교에 가면 교실 뒤편에 자리한 책장에 손을 뻗어 장르 불문하고 이것저것 읽은 기억이 난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도스포예프스키 [죄와 벌], 펄벅의 [대지], 나관중의 [삼국지],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등- 지금 생각해 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걸작인 이러한 작품을 아무 생각 없이 잡고 읽었다. 이때가 열 살부터 열세 살까지의 시기. 지금 뒤돌아봐도 내 인생의 ‘독서 황금기’라 당당히 일컬을 만큼 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넘쳤고 이를 뒷받침해 줄 여유와 시간도 가장 충만했던 시기였지 않나 싶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다양한 시리즈 등을 처음 접했고, 일본 작가들의 문학에 빠져든 것도 이 시기였다. 무라카미 류, 에쿠니 가오리, 히가시노 게이고, 츠지 히토나리, 요시모토 바나나, 오쿠다 히데오 등의 작품을 읽었다. 한창 일본문학의 지닌 특유의 분위기와 감성에 매료되었던 시기였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내가 책에 정말 ‘미쳤구나’ 했던 적이 있는데 당시 손에 쥐고 있던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었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얼른 책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은 충돌이 들게 하는 첫 책이었다. 부모님은 ‘일찍 잠자리에 들라’며 동생과 내가 있는 방의 전등을 꺼주시고 나갔는데- 나는 누워서도 계속 책의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그렇지만 동생의 잠을 방해할 수는 없기에 방의 불을 켤 수는 없는 상황) 손전등을 몰래 가져와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그 안에서 새벽까지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내 십 대 시절, 이토록 흘러넘쳤던 나의 책에 대한 애정은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지나며 점점 읽는 장르가 한쪽으로 치우치며 (대게는 소설, 에세이, 자기 계발서 조금) 장르면에서는 다소 덜 풍성해졌지만 나름 마니아적인 면모를 띄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용의자 X의 헌신] 이후로 ‘아 책이 나를 부른다!’ 하는 강렬했던 끌림은 없었던 것 같다. (혹은 나의 황당한 기억력 저편 어딘가에 묻혀버린 걸 수도 있지만)



그리고서는 거의 20년 만이다. 책이 나를 부르는 (사실은 내가 책을 미친 듯 찾고 있는 거지만) 폭풍 같은 강력한 이끌림이 온 것은.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책을 읽고 싶어 잠을 못 이루고 기어코 손전등을 가져와 몰래 이불속에서 읽었던 내 어린 시절때와 같이 독서 충동이 느껴진 도서였다.


나의 온 정신이 책 속에 깊이 파묻혀 있는 느낌. 나는 현실이 아닌 책 속의 상황 속에 들어가 있고 그들과 함께 기쁘고, 심각했다가, 웃고 우는- 그들이 나누는 감정을 그리고 감동을 고스란히 뼛속까지 함께 들이마시는 것이다.


책의 내용은 인상 깊었던 부분이 너무 많아 하이라이트를 치느라 정신이 없을 만큼 심금을 울리는 내용들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특히 이 책에 대해 애정이 더 특별했던 이유 한 가지는 저자 신경외과의사 폴이 환자들을 대할 때의 태도 때문이었고 또 한 가지는 폴과 아내의 관계가 슬프지만 강렬했고, 시린 눈바람을 이겨내고 피어낸 눈꽃처럼 눈부시도록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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