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기호화(이미지화)
우리가 간호하는 건 환자인가, 그들의 정보인가.
환자 해체를 통해 가상의 세계에 기호화, 수치화된 정보로 그들을 저장해 놓고 그 정보를 간호하려는 나를 떠올리며 그 당시에 했던 생각을 두서없이 정리해 보았다.
병동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 유난히 바쁘던 날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린 *+/-(주석에서 의미 참고) 치기 위해 일하는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어찌나 웃었던지 한 동안 다른 동료들한테 선배의 명언을 실어 나르기 바빴다. 그렇게 비지땀을 흘려가며 덧셈, 뺄셈에 진심이던 어느 날 간호사로서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시발점은 근무 교대 시간이었다.
"음... N선생님, 오늘 많이 바쁘셨죠? 환자 파악을 하려고 전산을 봤는데 많이 바쁘셨을 것 같아요."
교대 시간 전까지 해결 됐어야 하는 (+)들이 (-)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남은 일을 내가 해야 한다는 약간의 짜증과 바빠서 고생하셨을 N선생님 생각에 약간의 안쓰러움이 교차하며 말을 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오늘 수술도 많고 환자 상태도 좋지 않아서 일을 잘 못 한 것 같아요. 제가 남아서 하고 가겠습니다. 일단 인계드려도 될까요?"
N선생님의 죄송하다는 말과 지친 얼굴을 보니 '더 따뜻한 말을 했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 걸 알기에 죄송하다는 말을 들으면 괜히 죄책감이 든다. 일단 밀려든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기에 사적인 감정은 제쳐두고 인계를 받기 시작했다. 인계를 받다 언뜻 젖어있는 N선생님의 소매가 보였다.
"선생님, 소매는 왜 이렇게 젖어있어요? 울어서 그런 건 아니죠?"
지쳐있는 선생님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자 농담을 건넸다.
"아... 그건 아닌데 000님 삼 일 전부터 *네뷸라이져 하고 있는데 보호자님이 구강 간호를 잘 못해주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구강 간호 하다가 물이 묻었나 봐요."
N선생님이 차분하게 던진 말에 마음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간호의 둑이 깨지며 찰나의 순간 열반에 올랐었다. 물론 환자들이 누르는 호출벨 소리에 다시 금세 세인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그 깨달음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내가 구강 간호(+)를 볼 때 N선생님은 환자의 실존하는 구강을 더 나아가 환자 전체를 보고 있었다.
병원에서 일하면 알게 되는 충격적이지만 굳이 의식하지 않는 사실은 환자 실재보다 컴퓨터 안에 있는 '환자'를 더 오래 보게 된다는 것이다. 하루 환자와 대면하는 시간은 평균 20분을 넘기지 않는다. 나머지 시간은 현실에 있는 환자를 파편화하여 데이터로 저장하고 저장된 정보로 비롯된 각종 일들을 처리하는데 보낸다. 예를 들어 환자 A가 개복 수술 후 열이 나기 시작하면, 간호사는 일차 사정을 한다. A의 주관적 호소 경청, 활력징후 측정, 수술부위 확인, 배액관 양상 확인, 소변 양상 확인 등 현실에서 환자가 열이 오를만한 정보를 모으고 파악한 내용을 수치화하고 기호화해서 전산에 올린다. 이제부터 실재 A는 사라지게 되고 환자는 전산에 기록된 'A'로서 치료를 받게 된다. 의사는 'A'의 데이터를 보고 치료 계획을 세우고, 계획에 따라 여러 처방을 내기 시작한다. 처방은 간호사의 컴퓨터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고 처방에 따라 할 일을 정한다. A의 체온이 38.9도여서 해열제를 처방 냈다고 가정해 보자. 간호사는 'A' 데이터를 보고 처방된 해열제를 A에게 투약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A는 해열제를 맞고 2시간 뒤에 체온이 37도로 안정화가 되었고 간호사는 열이 내렸다고 기록한다. 전산에 존재하는 'A'는 해열제를 투약하고 열이 내린 꽤 안정적인 환자가 되었다.
환자 'A' 해열제 투약(+) 투약 후 체온 37도이고 깊은 수면 중임.
이것으로 해피엔딩?
N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나는 이것을 해피엔딩이라 생각했을 거다. A가 아닌 나에게만.
실제로 'A'의 체온이 37도라는 말은 현실에 존재하는 A의 체온도 37도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과정은 어떤가? 해열제를 맞으면 열만 뚝하고 내려가지 않는다. 올랐던 열이 떨어지면서 오한이 심할 수도 있고, 혈관에 들어가는 해열제로 인해 혈관통이 생길 수도 있다. 해열제의 한 종류인 아세트아미노펜이 정맥 주입 될 경우 기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혈압 강하가 발생하기도 한다. 해열제를 투약 후 열이 내려 수면이 든 줄 알았던 환자가 사실은 혈압이 떨어져 저승차사와 생사의 묵찌빠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A는 해열제 투약 후 체온 37도가 되었다.'라는 파편화된 정보, 원인과 결과의 단순한 모식에서 한 발자국 나와 환자 실존을 바라봐야 한다.
간호란?
1. 환자의 삶의 질 향상과 궁극적인 치유가 목적이어야 한다. 행위가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
2. 환자 해체를 통해 가상의 세계에 기호화, 수치화된 정보로 그들을 저장하고, 실제를 오롯이 반영하지 않는 그것들을 간호하면 안 된다.
첫 번째로 -/+는 단순히 인수인계를 위한 기록 혹은 업무 중 더블 체킹의 의미로 남겨두고 본질적인 간호의 행위를 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간호의 본질은 환자를 요구의 집합체로 보고 환자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요구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요구를 찾아 해결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의식된 요구는 환자가 어떻게든 표현하기에 문제가 썩 많지 않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요구는 간호사가 환자를 적극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찾아서 해결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의식 없는 환자의 등 아래 주사기가 있어 오래 동안 눌리는 경우에도 관심을 가지고 체위변경을 하지 않으면 근무교대 시까지 모를 수 있다. 또 앞선 구강간호 사례처럼 환자, 보호자의 지식 부족으로 요구가 필요한 사항인데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내가 이번 근무 동안 환자에게 이런 간호를 했다'를 보여주기 위해 -/+를 하는 게 아니라 요구의 겹을 하나씩 벗겨나가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행위가 간호의 본질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로 실재 환자가 아닌 전산에 있는 환자를 간호하는 모순에서 탈피해야 한다. 대면하는 환자보다 전산에 있는 환자를 더 오래 보다 보면 컴퓨터 세계에 있는 정보만으로 환자를 판단할 때가 많다. 물론 수치화된 환자 정보의 중요성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혈압, 체온, 진단검사 결과와 같이 수치화된 정보는 환자를 치료하는데 객관적인 지표가 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수치화 한 대상 실존을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자는 의미이다. 어떤 환자는 대변을 오일 동안 보지 않아도 불편감이 없는 반면에 이틀만 대변을 못 봐도 오심과 복부 불편감이 심한 환자도 있다. 수치화된 정보만 보면 무변 이틀차인 환자가 무변 오일 차인 환자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야 하지만 실제 임상에선 증상을 호소하는 무변 이틀차인 환자의 요구가 더 많다. 대변 카운트를 통해 단순히 전산에 기입하고 입력된 숫자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숫자의 가면에 가려져 놓칠 수 있는 사실을 알아채야 한다. 0,1의 세계에 존재하는 환자의 데이터는 실재 환자를 반영하는 일부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항상 총체적으로 환자를 인식해 간호를 해야 한다.
N선생님과의 대화 이후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간호의 지평을 넘어서 조금 더 성장한 간호사가 될 수 있었다. 1번과 2번의 깨달음은 환자를 보는 시각을 달라지게 했고, 실제로 임상에서 간호의 순간이 철학적인 의미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사람으로서, 간호사로서 한 단계 초월하게 해 준 N선생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지금도 어딘가에서 환자의 요구를 해결해 주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간호사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글을 줄인다.
*여기서 말하는 '+/-'는 '어떠한 것'이 진행이 되었는지를 공유하기 위해 전산에 표시하는 우리들만의 언어적 약속이다. 예를 들어 환자가 오늘 오전 아홉 시에 X-ray가 예정되어 있으면 9A X-ray(-) 이렇게 표시를 해 놓는다. 그리고 오전에 X-ray 검사 촬영이 완료되면 X-ray(+)로 전산을 수정해 놓는다. 한 마디로 '어떠한 것'이 수행되기 전에는 (-)를, '어떠한 것'이 수행되면 (+)로 표시해 동료 간호사와 소통하는 방식 중 하나라 말할 수 있다.
*네뷸라이저를 하고 나면 입에 약이 남아 구강간호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