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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베르탱 사진전, 빛을 사진에 담다.

철학이 잔뜩 묻은 사진전

by 끌로드

비 오는 어느 날, 구의역에서 전시 중인 조나단 베르탱의 사진전을 관람하고 왔다. 끌로드인 나로서는 도저히 <사진의 회화화 그로 말미암아 인상파를 재현한 사진전>이라는 주제를 참을 수 없었다. 오늘은 사진전에서 내 눈길을 붙잡아 그대로 땅에 뿌리내려 버리게 만든 작품을 나만의 시각으로 소개하려 한다. 약간은 주제넘지만 뭐 어떤가 이미 사진이 회화로 주제넘어 버렸는걸...


장 푸랑수아 밀레 <이삭 줍기>가 생각나며 바르비종 화풍이 뚜렷이 떠오르는 사진

전시회 초입에서 볼 수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고 작가가 인상주의를 담아내기 위해 사실주의부터 차근차근 접근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웅적인 것, 신적인 것이 주된 주제였던 고전에서 평범한 개인, 약간은 고단한 농민의 삶을 주제로 하는 사실주의로의 이행은 인상주의가 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바르비종파인 밀레는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풍의 화가였다. 밀레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해 질 녘의 노르스름한 빛의 색채는 포근히 농민들을 품어주며 그들의 존엄을 지켜주었다. 베르탱은 사려 깊은 밀레의 눈으로 위 노인을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밀레와, 베르탱 둘 다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이다. 어쩌면 베르탱의 피에는 밀레의 것이 섞여있을지도 모르겠다.


"제 생각에 인상주의는 꽃 한 송이의 색감, 하나의 순간, 일상의 한 장면 같은 단순함에 대한 깊은 애정에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상에 대한 애착을 전달하는, 세상 단순한 일상에 대한 열정이 인상주의라고 생각합니다-조나단 베르탱-


앵그르 <터키 목욕탕>의 구도로 바라보는 현대 피사체

위 사진은 베르탱이 뉴욕에서 일상을 보내며 촬영한 한 장면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구도의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앵그르의 <터키 목욕탕>이 떠오르는데 마치 보아선 안 될 것을 훔쳐보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런 형식을 '합법적 관음을 위한 구도'라는 나만의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변태성욕장애로 분류될 만큼의 수준이 아니라면 관음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하나의 해방이라 생각한다. 선글라스를 코에 걸치고 해변을 활보하는 뭇 청춘들을 생각해 봐라. 그들의 시선은 남들이 읽을 수 없기에 청춘들은 마음껏 대상을 탐닉할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의 브이로그를 보는 것도 약한 관음의 한 부분이다. 나의 본질이 파악당하지 않게 선택적 외부 가림막(선글라스, 핸드폰 등)은 익명성을 제공해 주어 내부로부터 모종의 권력을 생겨나게 한다. 그 권력에서 우리는 눌려왔던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다시 사진으로 돌아와 보자. 이 폭력적인 구도에서 베르탱은 무엇을 훔쳐보려 했던 걸까.


반사된 '그'는 과연 '그'일까?

사진을 보면 한 노파가 행인에게 무엇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얼굴의 반은 사진에 담겨 있는데 코 부분부터는 밑에 있는 거울에 반사된 모습만 보일 뿐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노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을 합성한 것이라면? 거울이 아니라 그림이라면? 혹은 옆에 서 있던 한 청년의 모습이라면? 애초에 거울에 비친 상이 온전히 현실의 세계를 담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사진은 우리의 세계를 담아낼 수 있는가? 무엇이 원본이냐는 플라톤주의에서 시뮬라크르까지 생각을 뻗치게 만든 이 작품은 내 기준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었다.


당구공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이 사진은 처음에 흘끗 보고 지나가다 다시 돌아와 벙찌게 만든 작품이었다. 생각해 보니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이 안에 있는 것들이고, 어떤 게 밖인지 구분할 수 있는가? 쉬이 구분되지 않기에 머리를 싸매다 보면 모리츠 에셔의 그림들이 생각난다. 모리츠 에셔의 그림에서 현상과 환상의 간극은 모순을 통해 해결된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될까. 패러독스의 매력에 빠질 준비가 되셨나?


한국인은 몬드리안 덕후다

조나단 베르탱은 을지로에서 한국적인 것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하나의 예로 이 셔터 문을 들었는데 한국인인 나로서는 셔터 문이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는지 한참을 생각하게 됐다. 이것에 한국적인 매력이 도대체 무엇일지 생각하다 끝에 남은 결론은

'아! 한국인은 몬드리안 덕후구나!'


표상은 부유한다, 인상파 작업의 물밑 작업

우리는 사물을 보지만 사실 사물에 반사된 빛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의 반사는 시상피질에 인지되어야 본 것으로 간주된다. 한마디로 사물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에 지각된 상을 인지하는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세상에 대한 빛의 반사가 어떻게 내 머리에 지각되는지를 그리는 사람들이다. 같은 세상을 보고 다른 세계를 인지한 그들은 각자가 느낀 표상들을 이젤에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완성된 그림은 건물의 표상이 부유한 위의 사진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끌로드 모네 <루앙 대성당>일까 조나단 베르탱의 사진일까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을 나열해 놓고 이 사진을 중간에 배열해 놓으면 위화감이 들까? 사진은 뚜렷하고 견고한 이미지가 담기기에 안개와 같은 인상을 담을 올바른 도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베르탱은 해냈다. 베르탱은 사진에서 견고함을 걷어냈고 빛이 주는 색채 만을 남겼다. 그리하여 완고한 대성당의 윤곽은 무너지고 하나의 인상으로 남게 됐다. 150년 전 사진기의 발달로 회화의 새로운 돌파구로써 등장한 인상파 회화가 150년 후 그 사진기에 담기게 된 역사의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참고로 모네는 사진기가 담을 수 없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노르망디 출신 작가의 <인상 해돋이>

인상 해돋이! 모네가 보았던 순간이 이거였어?

모네와 베르탱의 작품을 보면 '같은 냇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이 생각난다. 모네, 베르탱은 '하나의 대상'을 오랜 기간 관찰하며 시간의 흐름을 잡아내는 작가들이고 '같은 대상'이란 있을 수 없다 생각하며 매 순간의 차이에서 본인들이 인지한 아름다움을 화폭에 가두는 철학가다. 인상주의 스승 모네와 그의 제자 베르탱이 현실에서 만나 대화한다면 꽤나 대화가 잘 통했을지도 모르겠다.


"빛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리고 대기와 사물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끌로드 모네-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 150년을 기다려 만난 두 사람

이번 전시회의 하이라이트는 베르탱이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에서 작업한 작품을 앞선 작품들보다 큰 사진으로 전시한 방에 들어서는 것부터 시작된다. 일렬로 길게 늘어선 사진들은 밖에서 밀려 들어오는 채광에 휩싸인 채 하나의 인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오랑주리에 전시된 모네의 <수련> 연작과 겹쳐 보이며 베르탱이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이 확실히 모네의 것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큰 작품에서 나오는 아우라 탓인지, 사진으로 담아낸 150년 전 시각혁명의 감동 탓인지, 작품을 보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마도 작년 이맘때쯤 모네의 정원을 여행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베르탱의 사진처럼 미화된 표상이 되어 눈물로 흐른 게 아닐까.


조르주 쇠라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분할주의 쇠라가 원했던 감산혼합으로 꿈꾸던 가산혼합의 세계

전시회를 나가는 길, 마지막에 있는 사진들은 왠지 신인상주의, 거기서도 조르주 쇠라의 작품들과 닮아있다. 쇠라는 분할주의자였고 빛을 과학적으로 혼합하려 했다. 분할주의는 이념이고 그걸 이뤄주는 기술 중 하나가 점묘법이다. 분할주의는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망막에서 혼색이 되도록 작품을 제작하는 화파이다. 시냐크과 쇠라가 대표적인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감산혼합으로는 가산혼합을 만들 수가 없다. 나름 과학적인 접근을 한 그들이지만 의지의 관철만으로 오답이 정답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베르탱이 상기 사진을 찍으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예술은 마르지 않는 유산으로 우리들의 생각을 적셔나간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며 탈출, 근데 여긴 어디?

작품 안으로 들어가 옆에 있는 안경잡이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끝으로 전시회를 탈출했다. 전시회를 다 보고 <사진의 회화화 그로 말미암아 인상파를 재현한 사진전>이라는 슬로건으로 전시회를 홍보하는 것보다 <철학을 담는 사진가, 이번에는 빛을 담아내다>가 조금 더 이번 전시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색에 잠기고 싶은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고개를 들어 조나단 베르탱을 바라봐라!


나는 이만 간다. 근데 여길 어떻게 나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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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