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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다, 상미하다

by 끌로드

2025년 끌로드의 독서 진행 현황: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고전예술 편,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 편,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포스트모더니즘 편, 미학오디세이 1, 미학오디세이 2, 미학오디세이 3, 자본주의 리얼리즘, 이방인, 괴테의 파우스트, 저주토끼,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내면소통, 여행의 기술, 프란츠 카프카 단편선,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스토너, 철학적 사유와 인식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개념과 의미탐구, 철학적 사유와 현대예술 해석에서 혼란과 다양성 수용, 철학적 사유와 인식 하이데거의 존재물음과 현존재 사유, 철학적 사유와 인식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과 비관적 세계관. 파란만장 세계사 10대 사건 전말기, 서양철학사(진행 중) 그리고 일퍼센트 ebook.


독서란 작가의 집필 당시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작가의 집필 당시 맹렬하게 불타던 의지의 흔적을 보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내가 쓴 글에서 그런 흔적을 마주할 때면 '작열하는 나의 의지, 작렬하게 분출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쨌든 다시 책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책과 음식은 공통점이 많아 간단한 등식을 만들었다.


책=음식

집필=요리

독서=상미


책과 집필에 대한 얘기로 밤을 새울 수도 있지만 오늘은 독서에 대해서만 다뤄보려 한다.

독서는 상미의 과정과 같다. 여기서 상미는 자세히 맛을 본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다. 차려진 음식을 음미하지 않고 오로지 배를 채우는 행위에만 집중하면 요리사가 음식으로써 펼쳐낸 철학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그러므로 상미란 오감을 총동원해 음식을 지각하는 일종의 예술인 것이다. 흑백요리사에서 백대표가 음식 나온 것을 눈으로 보고 요리에 쓰인 재료를 안다던가, 입에 넣고 몇 번 오물거리니 어떤 음식인지 맞추는 것이 상미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건 일반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재료백과사전, 세계요리도감이 전두엽에 탑재된 백대표는 음식을 보는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본인만의 지표에 점수를 부과할 것이다. 취두부를 버무린 치킨? 1점!


우린 그저 백대표가 음식을 음미하는 과정을 모방하면 된다. 청각-시각-후각-미각+촉각 순으로 들어오는 감각을 곱씹어 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특정 재료 본연의 맛과 향이라던지, 재료끼리 엮였을 때 발휘되는 시너지라던지를 하나씩 알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그러한 것들이 내 기호에 맞는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핵심은 한 가지 음식을 먹더라도 꼭꼭 상미하는 것이다. 자세히 뜯어 맛 봄으로서 요리사의 철학이 담긴 요리는 오감의 편린으로 해체된다. 그리하여 해체된 파편은 내가 해석한 요리사의 철학으로 심신에 남게 된다.


어쩐지 상미하는 것에서 독서의 본질이 느껴지지 않는가? 책은 작가가 집필 당시 가지고 있던 생각과 철학의 집합체이다. 아무리 짧은 내용의 책이더라도 그 안에 자신의 정수를 담아내기 위해 작가는 지고의 시간을 지새운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꼭 담겨야만 하는 정순한 내용들을 엮어 낸 것이 책이다. 작가가 고민해서 얻은 오성을 우리는 읽어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읽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읽어내야 한다. 무엇을? 작가의 의도를.


책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매체다. 만약 그게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약간 애매하지만, 거기서도 의도를 찾아내야 한다. 그게 독서다. 텍스트로 구성된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없다. 그 텍스트의 의미를 읽어내 줄 독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독자가 작가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후루룩 마시듯이 책을 읽고 덮는다면 그건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박물관에 가면 내가 관심 있어 핥듯이 관찰했던 몇 점의 작품들만 기억나고 나머지 흘러가듯이 보았던 작품들은 전부다 기억에서 휘발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각해 봐라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니케, 비너스를 빼면 어떤 게 기억나지?


그리하여 책은 '작가-책-독자‘ 삼요소로 완성된다. 여기서 행위 동작은 두 개로 나뉘는데 그것이 집필과 독서다. 독서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짧게나마 집필을 알고 가야 한다. 집필은 작가의 내면의 것, 즉 무의식에 침잠해 있는 재료를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의도에 맞게 추출해 내어 글자로 꺼내 놓는 과정이다. 그게 에세이가 될지, 소설이 될지, 시가 될지는 요리하는 사람 마음이지만 어쨌든 본인의 재료로 요리를 펼쳐내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된다. 집필을 통해 흩어져있는 사유의 조각들이 조합되어 책이 탄생했으니 독서는 역순으로 완성된 책을 자세히 상미함으로써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면 된다.


다만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라는 말이 작가의 생각을 그대로 수용하라는 것과는 다르다. 폴 세잔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화풍에서 누군가는 색채를 해방하고 누군가는 형을 해방한 것처럼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되 내 언어로 흡수해야 한다. 무비판적인 독서는 되려 프로파간다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고 정크푸드처럼 삶에 도움 되지 않는 질 나쁜 책에 매몰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줏대를 바로 세우고, 이성 거름망을 넓게 펼쳐 불순물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며 글쓴이의 올바른 도리만 취사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모순적이게도 이런 힘은 독서, 다시 말하지만 다양한 책을 상미해야 기를 수 있다. 정리하자면 독서는 보는 것이 아닌 읽어 내는 것, 작가의 의도를 내 언어로 흡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긴 이야기의 호흡으로 숨이 차기 시작했다. 내가 길게 얘기해 봤자 이미 이 글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여기까지 읽은 독자에게는 저마다의 독서의 정의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정의에 내가 살면서 느낀 오의가 엮여 더 큰 시너지 일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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