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톨의 자그마한 콩알에서 만나는 거대한 우주
둘째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 강낭콩 싹 틔우기 과제가 있어 거의 30여 년 만에 다시 키워 보았다.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어릴 땐 수확의 결과물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부모가 되니 성장의 모든 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의 씨를 심었는데 콩깍지에서 여러 개의 콩을 수확하고... 똑같은 물과 햇빛 속에서도 발아엔 시차가 있었고 성장 속도가 느려도 종국엔 열매를 거뒀다. 수확할 때는 씨가 생장(生長)의 마지막 결과물이었는데 심을 때가 되니 그 끝이 다시 시작이 되었다. 작고 가벼운 씨앗 속에 시작과 끝이 함께 있다. 수많은 시간과 기억의 층을 지닌다. 윤회처럼, 뫼비우스의 띠처럼 작은 씨앗 속에서 ‘순환’을 보았다.
무성한 나무도 시작은 작은 씨앗이었다. 이는 무엇인지 반으로 잘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물을 주고 키워가며 알아내야 하는,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듯이 시간이 필요한 잠재된 덩어리다. 같은 씨앗이지만 성장 속도가 제각각 이듯 인간도 인생의 꽃 피는 시기가 모두 다르다. 심지어 꽃이 못 필 수도 있다. 믿고 기다리며 돌보고… 때가 되면 자립하는 양육의 사이클을 상상해본다. ^^*
콩을 한참 그릴 무렵 경주에서 신라 금관에 달린 곡옥(曲玉)을 보았다. 강낭콩의 형태와 곡옥은 정말 비슷했다. 태양을 상징하기도 하는 ‘출(出)’자 모양의 금관에 대롱대롱 매달린 곡옥들. 초음파 사진의 태아가 연상되었다. 인간 외 다른 생명체 시작도 곡옥의 형태와 비슷하다는 점이 신기했고 이것이 권력의 상징인 왕관 장식품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우리 일상의 삶, 몸, 음식, 식물, 작품의 주제와 표현 방법, 재료 등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무한 증식하는 듯한 콩을 그릴 때 한지에 황벽으로 염색한 후 그리기도 하고 습식 벽화(프레스코), 흙 벽화, 한지(순지, 장지), 천(견과 면, 마 캔버스) 등 다양한 바탕재에 안료와 자연 염료(소목, 황벽, 오배자, 쪽 등), 기타 재료(금분, 백토, 들기름, 밀랍, 진주분 등)를 진채 기법으로 표현하면서 물성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그림은 음악, 무용과 달리 ‘물질’을 바탕으로 한 예술이고 이러한 다양한 재료에 관심은 박사 논문으로 이어졌다.
한 끼의 식사는 곧 생명과 직결되고 일상은 내 몸이라는 소우주에서 시작한다. 새콤한 쥐눈이 초콩, 고소하게 볶은 서리태, 삶은 병아리 콩을 주기적으로 만들고 강낭콩, 완두콩 등은 즉흥적 조합으로 밥에 넣어 먹는다.
끼니와 끼니 사이를 하나의 ‘생(生)’이라고 볼 때 우리는 지속해서 먹으며 생을 이어간다. 먹고사는 것이 생을 지속시키는 일이고 그 속에 삶이 녹아 있다. 이렇게 돌고 도는 우리네 일상은 소행성 같다. 행성처럼 움직이고 순환하는 일상의 삶. 한 톨의 자그마한 콩알에서 거대한 우주를 만난다. 삶과 죽음, 자연과의 상생이 이 한 톨에 담겨 있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