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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혜인 Hye in Choi Sep 11. 2022

상처받기 쉬운: 호두

진정한 성숙함을 위하여

<상처받기 쉬운> 단단한 껍질로 강해 보이지만 안에 있는 호두는 부서지기 쉽다.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의 피부에 삶의 흔적인 상처가 많아지고 오래 남는다. 물리적 상처와 함께 마음의 상처도 경험한다. 인간 관계에서의 상처는 공감 능력을 향상시키는 장점도 있다. 생존에 적당한 스트레스가 생명체를 강하게 만들 듯 이러한 상처들로 ‘어른’이 되고 성숙해진다. 『소학(小學)』에 ‘인간은 뒤돌아볼 때마다 어른이 된다. 세월을 견디고 비바람을 버텨야 나이테가 쌓인다.’라고 쓰여 있던데… 미성숙한 나는 언제쯤 진짜 어른이 될까.


2013년 호두를 소재로 ‘상처받기 쉬운(Vulnerable)’이란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 후 2017년 같은 단어, ‘vulnerable’에 관해 어떤 작가가 쓴 글을 보고 너무나 생각이 비슷해 놀라고 반가운 마음에 용기를 내어 작가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냈던 에피소드도 있다. 글을 쓰는 작가라 역시 추상적 느낌을 잘 서술해주었다. 책 일부를 옮겨 본다.


‘Vulnerable’의 사전적 의미: (~에) 취약한, 연약한(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상처받기 쉬움을 나타냄) 유사어로 weak, fragile, susceptible. 유의어 중 helpless도 있는데 ‘어찌할 수 없는, 속수무책인’이란 뜻이다. 나는 인간이 내면에 저마다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취약성 Vulnerability을 몹시 애틋하게 생각한다. 평소엔 강한 척, 괜찮은 척 담담하게 살아가다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속의 연한 Vulnerable 부분을 드러내고야 마는 솔직함도 좋다. 

‘Vulnerable’이라는 단어는 강자의 억압에 의해 약자가 수동적으로 약해진다기보다, 본인이 스스로의 취약함을 받아들이는 자발적 태도가 느껴진다. 그래서 속수무책이라 하여도 어쩐지 행복해하는 느낌이 스며 있다. 인간의 약함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져서, 다가가서 꼭 안아주고 싶게끔 만드는 단어다. 또한 무언가에 취약하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이나 복잡한 마음이 들어가 있음을 의미하기에, 마음속에 겹겹이 쌓인 진심을 찾아가는 과정을 유도하기도 한다. _임경선, 『자유로울 것』, 편애하는 영어 단어들_pp.175-176


<닮음과 닮지 않음의 사이> 순지에 먹, 콜라쥬_130x67cm_2006  닮은 듯하나 닮지 않은 두 개의 호두는 부부 관계 같기도 하다.


예술은 말로 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호두를 보면 ‘상처받기 쉬운’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부드러워 부서지기 쉽다(호두와 흡사하게 생긴 인간의 뇌도 말랑말랑해 충격에 취약한, 상처받기 쉬운 부위라고 하던데…). 사람도 그런 것 같다. 강해 보이는 사람이 더 여리고 상처받는다. 특별히 강해 보이지 않고 무심해 보이는 사람이 실제로 더 강한 경우가 많다. 


작고 여린 장미도 숨겨진 가시를 지니고 있다. <상처받기 쉬운>은  여린 마음을 붉은 피 같은 바탕에 흑백,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장미로 표현하였다.


이 단어를 시각화하기 위해 상처받기 쉬운, 뾰족한 가시가 있는 붉은 장미를 그리기도 하고 두 개의 추상적 이미지로도 표현해보았다. 예전에 아이가 그림을 보더니 “엄마는 왜 뭐든지 두 개를 많이 그려?”라고 물었다. 세상은 음양(달과 태양), 여성과 남성, 어둠과 빛, 밤과 낮, 차가움과 뜨거움 등등 두 근원의 힘이 만나 밀고 당기는 힘으로 무언가가 생성, 순환한다고 생각해 그런 것 같다. 연약해 보이는 부드러운 세필과 연필로, 얇은 순지에 그러한 흔적들이 쌓여 만들어내는 견고함, 단단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힘의 크기가 상황에 따라 열등하기도 하고 대등하기도 한 <두 종류의 힘>들을 시각화하였다.


장지에 황벽 염색 후 연필로 그린, 세포가 분열하는 듯한 <사물의 시작>(왼쪽), 장지에 목탄, 먹, 안료로 그린, 비우고 채우며 순환하는 <돌고 돌다>(오른쪽)


수렴과 발산, 팽창과 수축 등 여러 종류의 <두 종류의 힘>들


호두를 끓는 물에 데친 후 에어 프라이기에 볶아 먹는다. ‘상처받기 쉬운’ 씁쓸한 호두가 담백하게 재탄생한다. 맛의 변신이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상처가 승화되어 새로움을 선물해주는 것 같다. 상처받고 차갑게 막힌 덩어리들이 녹아 순환하고 따뜻해지는, '해빙'이다.


<해빙하다> 한 겨울 얼음도 때가 되면 금이 가며 녹는다. 얼음 같은 차가운 관계도 녹기 시작하는 이미지를 새하얀 조개가루와 백토의 바탕 위에 금분을 사용해 순지에 표현하였다.


http://www.hyeinch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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