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미와 현미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양의 밥을 짓는다.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선택이라면 백미와 현미, 콩, 귀리 등 잡곡의 비율을 어떻게 달리 할까 정도? 예전에 비해 쌀 소비가 눈에 띄게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일 밥을 짓는다. 밥 짓는 소리와 구수한 밥 냄새는 엄마 품처럼 늘 넉넉하고 푸근하다. 둘째가 어릴 때 쌀을 가지고 모래 놀이처럼 만지작거리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같이 놀면서 쌀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식사 준비로 빨리 해치우고 싶었던 쌀 씻기, 밥 짓기가 다르게 다가왔다.
‘백미’는 눈처럼 하얀 결정체로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쌀알은 많이 깎여져 상처투성이다. 온전한 타원의 형태가 없고 영양학적으로 불충분하다. 반대로 현미는 누르스름한 색과 울퉁불퉁한 형태로 불완전해 보이지만 영양은 백미보다 월등히 우수하다. 음양의 균형이 완전한 곡물이다. 보이는 외관과 품고 있는 내면은 다르다.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결혼을 하고 ‘밥’에 관해 새로운 경험을 했다. 제사상에 올리는 쌀밥과 생일날 먹는 쌀밥. 하나는 돌아가신 조상께 올리는 밥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어난 아이를 위한 생일상에 미역국과 함께 먹는 쌀밥이었다. 소복이 담긴 쌀밥을 보면서 죽음과 탄생이 ‘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생성과 소멸’.
‘살림’의 어원이 인간이면 누구나 동참해야 할 숭고한 노동,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본다면, 나는 우리가 자주 접하는 먹거리 채소, 곡물에서 진정한 ‘살림’을 만나고 ‘식구(食口)’의 원초적 의미에 관해 생각한다. 탄생 후 생일상과 죽음 후 제사상에 오르는 쌀 한 공기로 삶을 형상화하였다.
친정 엄마는 늘 “밥 잘 먹고 다녀라. 밥심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시고 갈 때마다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주신다. 예전에는 못 느꼈는데… 엄마가 되고 나니 이것이 인간에게 영양을 제공하는 단순한 밥 한 공기가 아니라 ‘사랑’의 다른 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경주 왕릉의 봉분이 엄마 가슴처럼, 한 공기의 밥처럼 보이기도 하고… 흰쌀밥에 담긴 정갈함과 잡곡밥이 뿜어내는 야생의 생명력, 농부의 노고, 정성을 한 톨 한 톨 씹으며 생각한다.
가사 노동으로써의 살림은 지겨웠고 여기서 탈출하고 싶었는데…한 솥 밥 먹는 식구들을 ‘살리는’, 진정한 ‘살림’이 매일 반복되는 밥 짓기에 있었다. ‘살림’은 부엌데기 엄마들의 궂은일이 아니라 인간을 먹여 살리는 일이었다. 하찮다고 생각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니 가치 있는 일로 여겨졌다. 작가와 주부의 공통점은 노동의 시간만큼 보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의기소침할 때도 많았는데… 이제 알았다. 밥 짓기도 밥벌이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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