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를 전달하다
연두 모과가 노랗게 익어간다. 모과를 딸 즈음이면 가을이 중반을 넘어간다는 뜻이다. 고등학교 때 교정에 있던 모과 열매 따다 혼난 적도 있고... 그래도 전리품처럼 몇 개 건져서 그 가을 뿌듯했던 기억도 있다. 모과만의 끈적거리는 표면과 향은 정말 독특하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외양은 울퉁불퉁하지만 향은 그윽하고 뛰어난 효능을 지닌 모과. 과육이 딱딱하고 시고 떫어서 날 것으로는 못 먹고 모과청을 만들어 차로 마신다. 몸에 온기가 퍼진다. 나는 모과차의 달콤한 첫맛과 함께 따라오는 떫은 뒷맛을 좋아한다.
불쑥 솟고 움푹 파인 부분이 인상적이라 이 부분을 마주 보게 흑백 대비로 그린 모과 그림을 시작으로 소목 염색 후 안료로 그린 붉은 모과 등 여러 모과를 그렸다. 꼭지 부분이 사람의 배꼽처럼 태초의 느낌이 들어 <사물의 시작>이라고 이름을 붙인 작품도 있고… 나는 화려한 외모가 아니지만 묵직하게 존재감 있는 모과에 눈길과 손길이 간다.
식탁 위 양(陽)의 기운이 넘치는 다른 채소로 마늘과 양파가 있다. 마늘과 양파는 가지처럼 동, 서양 각지에서 다양하게 쓰이는 기본 식재료로 어느 요리에 넣어도 튀지 않고 음식의 풍미를 살려준다. 단군 신화 속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었다는데 나처럼 수족 냉증이 있는 사람에게 마늘은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외국에서 속이 울렁거리거나 기력이 좀 약해졌다고 느껴질 때 마늘을 볶아 먹으면 가라앉으면서 힘이 났던 기억도 있다. 곰의 후손이라 그런가…?^^
양파는 토마토, 수박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생산량이 많은 3대 작물 중 하나로 ‘식탁 위의 불로초’라고 할 정도로 4000년 전부터 인류가 사랑한 채소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노동자들의 원기를 북돋아주는 음식으로 여겨졌고 인부들에게 마늘과 양파 공급이 끊기면 난리가 났다고 한다. 적색 양파는 아삭 거리는 질감이 사과 같기도 하고 은은한 단맛이 있어 샐러드에 생식으로 먹는다. 썰 때 눈물, 콧물 흘리게 만드는 백색 양파는 먹을 때 단 맛의 만족감으로 흘렸던 눈물이 보상받는 느낌이고…
이 양파는 깔 때마다 느끼지만 참 특이한 형태를 지녔다. 동심원 형태로 무한 반복의 ‘영원함’도 느껴진다. 이런 형태의 특징과 양기를 돋는 성질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양파가 태양을 상징했나?’ 하는 맹랑한 상상도 해본다. 까도 까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을 ‘양파’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 매력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으면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양파 같은 사람이 되라고 했던 우스개 소리도 생각난다. 희로애락이 ‘겹겹이’ 쌓인, 신비한 사람을 뜻하는 것일까?
동서고금으로 인류가 애정 했던 마늘과 양파. 이들은 오랜 시간 인간에게 양기(陽氣)를 준 식재료로 나의 몸과 마음에도 온기를 채워준다. 못 생겼지만 자꾸 눈길이 가는, 묘한 매력의 모과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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