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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혜인 Hye in Choi Sep 12. 2022

달과 여성: 곡식

유기적으로 연결된 불가분의 관계

곡물의 발아, 번식, 수확 등 농사는 달과 깊은 연관이 있다. 


보름달 추석이 다가온다. 나는 농부는 아니지만 햇곡식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고 넉넉해진다. 매일 접하는 곡식과 채소. 이들은 소소하고 가녀리지만 강인하다. 땅에서 수확된 이 먹거리들은 먹기 쉽고 자연적이며 생명과 영양이 충만해 인간의 몸과 마음에 활기를 준다.


곡물의 발아하고 번식하는 과정은 하늘의 달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시계도, 달력도 없었던 시절, 달의 주기에 따라 농사의 파종, 추수 시기가 결정되는 등 농경민족과 달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나에게 달은 서로 다른 존재가 끌어당기는 힘, ‘인력(引力)’이 느껴지는 천체이기도 하고… 달과 곡식, 인간.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조건이 되고 정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달> 장지에 백토, 아크릴로 그린 2012년 달 시리즈의 초기작이다.


나는 형태가 조금씩 변하는 밤하늘 달의 모습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만물을 생성시키고 스스로 변화하는 달의 속성이 임신, 출산 등 여성의 가변적 삶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일정한 형태의 태양과 달리 반달, 보름달, 초승달, 그믐달 등 변화하는 형태로 변덕스럽고 불규칙적이라 여겨졌던 달은 실제로는 일정한 ‘주기’를 가진, 매우 규칙적인 행성이다. ‘월경(月經)’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달이 지나는 길을 말하는데 약 한 달 주기의 달과 여성의 월경 주기는 매우 흡사해 놀라웠다.


<소행성> 순지에 과슈, 먹, 안료_51x65cm_2014 붉은 해와 하얀 달을 둘러싼 곡식들


오곡밥으로 구성된 <정월 대보름>(왼쪽)과 쌀로 이루어진 봉분 <살림>(오른쪽) 작품


고대 원시 공동체에서 생리 중인 여성은 음식을 만들거나 들일을 하는 것들이 금지되고 남편과 아이가 있는 집을 떠나 혼자 숲 속 오두막 같은 곳에 머무르며 금식을 하거나 정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이렇게 매달 치러지는 합법적이고 고독한 은둔 생활은 육체적인 본성과 더불어 내면과 가까이 접촉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 같다. 물리적으로 격리된 ‘자기만의 방’에서, 온전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 원시 시대 여성이 한편 부럽기도 했다. 엄청난 휴가다.


여성이 가진 중요한 기능을 번식력이라고 볼 때 원시 신화 속에서 달은 생식 능력을 지니는 대지 모신(母神)으로 여겨졌고 특히 서아시아 국기에 많이 등장하는 초승달은 생장하는 모든 것들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터질 듯 꽉 찬 보름달도 아름답지만 다시 시작하는 초승달의 잠재된 생명력도 경이롭다. 절정에 다다르면 내려오는 것이 하늘의 이치…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과거에 급제하는 ‘소년등과(少年登科)’보다 미래에 대해 더 소망할 수 있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고구려 벽화 속 해 안에 그려진 '삼족오(三足烏)' 처럼 해와 달 안팎에 음지 식물인 콩나물과 버섯을 그려 넣었다.


우리네 인생은 정지되어 있지 않고 떠도는 별처럼 계속 움직이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일반적으로 태양이 따뜻하다고 여겨지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달이 더 따뜻할 수도 있다. 태양은 밝은 곳을 비추지만 달은 어두운 곳을 비추기 때문이다. 어두운 곳을 보듬고 품는 사람이 언젠가 될 수 있을까…? 


이문세 콘서트에서 “인간의 마음은 상대에 따라 넓은 바다처럼 열리기도 하고 작은 바늘구멍처럼 닫히기도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내 마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몸은 시간의 흐름에 정직해서 점점 경직되지만 마음만큼은 규칙적으로 변화하는 달처럼, 예전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유연해지길 바랄 뿐이다.


<만월> 면 캔버스에 금색 안료, 과슈, 아크릴_70x70cm_2015  유영하는 듯한  강낭콩을 소재로 달과 바다의 인력이 충만함을 표현하였다. 


 찰칵! 2022.9.3. 운 좋게 맑은 서울 하늘의 달을 손에 담았다!


http://www.hyeinch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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