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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혜인 Hye in Choi Sep 23. 2022

붉은 브로콜리와 검정 상추

낯선 상상력과 아름다운 조화

절단된 브로콜리는 커다란 나무처럼 보이기도 한다.


몇 년 전에 <녹색 동물>이란 EBS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식물은 남을 해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고 다른 생명체에게 에너지를 주는 공급원이다. 동물처럼 분명하게 보이진 않지만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과 욕망의 가열찬 삶이 있다. 식물이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건 인간의 선입견이었다. 인간이 식물의 속도를 인지하지 못할 뿐, 식물은 나름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도 모두 자기 나름의 ‘속도’대로 살아간다. ‘나의 속도로 아이들을 보면 안 되겠지. 기다리는 것이 육아의 가장 큰 덕목일 텐데…’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 남부 시골 시장에서 만난 브로콜리, 콜리플라워, 로만 브로콜리. 프랙털 형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2015년 프랑스 툴루즈 시장에서 ‘로만 브로콜리’를 보았다. 원추형의 중첩된 나선으로 반복되어 밀집된 형태는 ‘프랙털(fractal)’ 이미지의 전형이었다. 언뜻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내재된 질서와 규칙의 반복으로 형태가 생성되는 프랙털 원리. 눈송이, 나무, 꽃 등 자연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이 이에 해당된다. 하나의 구조가 반복되어 복잡하면서도 거대한 유기적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상한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식재료가 미니어처 같은, 낯선 조형물처럼 다가왔다. 기이한 아름다움...! 작은 크기의 브로콜리가 국립생태원에서 본 거대한 바오밥 나무와 오버랩되면서 생경하게 느껴졌다.


<내리막을 절정> 절정에 이르면 내려오는 게 하늘의 이치. 폭발하는 듯한 절정을 장지에 들기름, 안료, 호분으로 표현하였다.
<내리막을 위한 절정> 부분도_브로콜리가 하나의 세포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필과 무수한 점으로 표현하였다.


<만개> 장지에 과슈, 백토, 안료_53x45cm_2020  개인전 <양생> 전시장면


<봄의 생기> 장지에 과슈, 백토, 안료_72x136cm_2021 잘린 브로콜리는 색을 변환해 낯설어졌다. 고목나무에서 움트는 봄의 기운을 형상화하였다.


만개인 상태의 브로콜리를 하나만 배치해 검정 배경에 식물 초상화처럼 그린 것을 시작으로 덩굴처럼 얽혀 있는 초록 브로콜리, 오렌지, 흰색 콜리플라워 등을 꽃다발처럼, 절단된 브로콜리들을 모아 고목나무 밑동처럼 그리기도 하였다. 시점을 달리 한 정면과 뒤집힌 두 개의 브로콜리를 소재로 붉게 그린 <양생(養生)>작품은 2021년 갤러리 도올에서 열린 개인전 제목이 되었다. 초록 브로콜리를 붉은색으로 변환시켜 피 같은, 원초적인 생명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양생(養生)_생명을 북돋다> 장지에 금분, 백토, 안료_162x130cm_2021  개인전 <양생> 전시장면
부분도_팽창하는 듯한 양(陽)의 이미지로 남성성을(왼쪽), 뒤집힌 브로콜리는 수렴, 음(陰)의 이미지로 여성성을 내포하고 있다(오른쪽).


최혜인 개인전 <양생_생명을 북돋다> 전시도록_갤러리 도올_2021


단단한 브로콜리와 반대인 여린 상추를 보았다. 상추는 너무 흔해서 유심히 보지 않았던 채소였다. 다른 채소와 달리 고유한 맛도 잘 모르겠고 보자기 같은 ‘쌈의 기능’으로만 주로 먹었었는데 노지에서 금방 수확한 상추를 먹고 ‘아! 이게 상추 맛이구나!’ 비로소 알게 되었다.


<상추 산맥>_면 캔버스에 과슈, 아크릴_90x90cm_2012(왼쪽), 상추 잎 드로잉_종이에 파스텔, 연필(오른쪽)


씻을 때마다 찢어질까 조심조심하게 되는 상추 잎. 여린 상추 잎에 물을 빨아들이기 위한 촘촘한 잎맥들에 규칙이 보였다. 잎자루 가운데에서 나온 주맥(主脈)과 지류처럼 갈라진 측맥(側脈)들. 이 사이에 더 가는 맥들이 그물망처럼 이어진 세맥(細脈)들. 나이테처럼 잎맥은 잎의 성장 기록이고 이를 혈관처럼 표현하였다.


<상추 꽃> 장지에 과슈, 백토, 안료_90x90cm_2012


<흡수하다> 순지에 먹, 안료_38.5x46cm_2019  채소의 유연하면서도 질긴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진채 기법으로 수십 회 색을 올렸다.


양과 음의 균형으로 볼 때 곡물로는 현미가 가장 균형 잡힌 완전한 식품이고 잎채소과에서는 양배추라고 한다. 같은 잎채소 계열로 중간에 양배추를 기준으로 양(+)의 기운으로는 배추가, 음(-)의 기운으로는 상추가 있다. 양의 성질인 배추는 안으로 모이는 밀집된 형태로 불로 익혀 먹기도 하지만 음의 성질인 상추는 밖으로 퍼지는 형태로 생식으로 먹는다. 음양의 중간에 있는 양배추는 안으로 오그라드는 중간 형태로 익혀 먹거나 생식도 둘 다 가능하고… 나는 양배추와 배추는 엄청 좋아하지만 상추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마 내 몸이 찬 편이라 음인 상추가 잘 안 맞았던 것 같다.


이처럼 채소의 성질에도 사람의 체질처럼 음, 양이 있다는 게 참 신비롭다. 동물성인 달걀은 음(흰자)과 양(노른자)이 하나의 개체 안에 혼합된 통 음식이고… 음식과 인간 간의 궁합을 보면서 생명체의 ‘아름다운 조화’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인간과 땅에서 수확한 생명의 먹거리… 각각 하나의 소우주다. 모두 존재 이유가 있다.


 <심장_흡수> 캔버스에 과슈, 아크릴_162x130cm_2015  '흡수'를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심장'처럼 중요한 흡수를 상추 잎맥에서 착안해 표현하였다.


http://www.hyeinch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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