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와 무명(無名) 씨앗들
나는 도시에 살면서 씨앗을 통해 자연의 뿌리를 상상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박완서 님 책에서 ‘땅 속이 다 씨앗’이란 문구가 요즘에 비로소 마음에 들어온다. 눈에 보이는 개미는 되도록 밟지 않으려 피해 다녔지만 땅 속의 씨앗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보도블록 틈새의 땅에서도 싹은 올라오고 밟고 잘라내도 싹을 틔우는 잡초의 생명력은 놀랍기만 하다. 귀한 대접받는 화초보다 잡초처럼 강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싹을 틔우며 생명의 여정을 시작하는 씨앗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잠재된 생명력의 환상을 나에게 선사한다.
산딸기는 여전히 6월 즈음이 제철이지만 전반적으로 요즘 딸기는 겨울로 생산시기가 앞당겨지고 있다. 제철의 변화도 아직 적응되지 않았는데 하얀색, 살구색 등 다양한 색의 딸기는 더더욱 낯설다. 물컹한 과육으로 쉽게 상처받기 쉬운 딸기를 땅으로 솟은 거대한 산처럼 그려 <중심 잡다>라고 이름을 붙였다. 깨처럼 작은 씨가 촘촘히 열을 지어 박혀 있는 딸기는 흔들림 없이 당당하다.
나는 예전에는 조용한 겨울보다 에너지가 생동하는 여름이 좋았다. 겨울은 손발도 차가워지고 모든 생장(生長)이 끝나고 죽어 있는 것 같아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니…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 이면에 잠시 멈추는 ‘겨울’이 보이기 시작했다. 겨울은 안으로 여무는 단련의 시간이고 생명이 쉬어 가는 시간이다. 한 해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매섭지만 새하얀 첫눈은 순수하다.
겨울은 또한 침묵의 계절이다. 침묵은 듣기는 하지만 말하진 않는다. 들어간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림이 공자님 말씀처럼 ‘하얀 바탕’이 기본인 것처럼 음악은 침묵을 전제로 한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베토벤이 침묵을 사용하는 방식에 관해 언급하면서 “침묵을 살리기 위해 앞의 음이 존재한다. 결국 베토벤이 들려주고 싶었던 건 소리 뒤에 숨어있는 침묵”이라는 인터뷰를 보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 ‘침묵’의 힘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음악가의 궁극적 관심은 눈앞에 있는 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면에 있는 것인가? 그럼 그림은…? 일상 속에서는? 말만이 의사 표시가 아니고 ‘침묵’이라는 방식을 통해 의견을 표현할 수도 있다. 침묵은 말을 뛰어넘는다. 눈빛이나 얼굴빛, 몸짓으로 생각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침묵할 때와 말할 때를 안다는 것, 제일 어려운 일이다.
침묵과 인고의 시간을 견딘 씨앗이 싹을 틔운다. 소설가 김 훈이 ‘헐거워진 씨앗’이라는 표현을 하여 이를 그린 그림이 있다. 단단했던 아보카도 씨앗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헐거워지며 껍질이 벗겨지는 것을 보고 그린 그림이다. 얼어 있는 땅 속을 뚫고 여린 새순이 올라오려면 씨앗의 껍질이 헐거워져야 가능한 일이다. 인간도 ‘헐거운’ 구석이 없으면 유연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진다. 새로운 기운을 흡수하려면 여유 공간이 많아야 한다. 마음의 ‘여백’이다. 여백이 있어야 보인다. 이런 마음으로 침잠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소리와 침묵처럼 삶과 죽음은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죽음은 삶과 짝이다. 이때 생명은 단순히 ‘있음’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의미이다. 이름 모를 잡초들을 보면서 수많은 무명의 씨앗들을 마음속 풍경으로 그렸다. 겨울 끝 다가오는 봄의 계절에 해빙하여 흐르는 물처럼, 대지 위에 흩뿌려진 씨앗들을 추상화하여 그려보았다. 겨울을 보내야 봄이 온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는 사물의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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