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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혜인 Hye in Choi Oct 05. 2022

그리다, 살리다: 삶의 풍경

따로. 또. 같이

<Come & go> 순지에 백토, 안료_69x60cm_2014  뭉치고 흩날리는 쌀들로  '오고 가는' 삶의 풍경을 그렸다.


“그냥 본 것을 적기만 한 것이 아니다. 관찰에 그치지 않고 그 결과를 사색하여 삶의 문제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것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겼다. 생각의 힘은 그냥 길러지지 않는다.”


<관찰의 힘과 메모의 습관>_2001.6.9 조선일보 칼럼_정민


근육의 힘이 아니라 ‘생각의 힘’을 키우고 싶었다. ‘관찰’과 ‘기록’이 기본 바탕이었다. 틈틈이 쓴 메모들을 모으고 그림에 등장하는 식재료들을 계절의 흐름에 정리해보았다. 쓰다 보니 총 20편의 <그림, 살림>에 관한 글이 모였다. 살면서, 그리면서 음식과 그림에 관해 담아 놓았던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나와 쓴 글이었다.


매일 먹는 쌀도 순간 신기하게 보일 때가 있다. 일상에서 비일상의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토마토, 가지, 감자, 버섯, 브로콜리, 상추, 호두, 쌀, 콩 등등 땅에서 수확한 제철 음식들, 곡물과 채소들은 생물학과 분류학의 관점, 영양학과 건강학의 시각에서 다룬 것이 아니다. 이들은 나에게 텃밭의 작물이나 시장의 상품, 식탁의 음식이 아닌, 때로는 인간관계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존재감을 지닌 고유한 개체였다.


파프리카의 씨앗을 소재로 엄마, 자궁, 생명 이미지를 그린 <잉태하다>  장지에 과슈, 안료_43x33cm_2019  시간은 생명체를 소멸시키지만 동시에 잉태시키며 되풀이한다.


<조용한 열정> 리넨 캔버스에 과슈, 아크릴_33x21cm_2019  


사람의 기(氣)는 ‘식(食)’에 준한다. 먹는 음식이 정해지면 기가 정해지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몸이 무너지면 정신이 무너진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음식을 강조하셨고 아빠는 운동과 바른 자세를 공부보다 더 중시하셨다. 운동이 외식이라면 자세는 집밥! 여러 가지 면에서 ‘집밥’이 중요하다.


음식을 하면 할수록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떻게 이렇게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을까? 제철 봄나물을 먹을 때는 음식이 아니라 연두 기운, ‘봄’이란 계절을 먹는 느낌이라 경건해지기도 한다. 땅에서 수확된 먹거리, 물질들이 몸속에 들어와 나에게 양분을 준다.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하나의 생명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양생(養生)’. 생명을 북돋는 행위. 현대인은 과식하지만 영양은 부족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양이 불균형한 상황으로 더더욱 양생에 관심이 간다. 결국 모든 것은 ‘균형, balance’.


나의 입맛의 뿌리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엄마의 음식이다. 음식은 결국 ‘재료’와 ‘정성’으로 먹는다. 엄마의 음식에 관한 풍성한 기억들과 내가 다시 ‘엄마’가 되면서 식재료들이 자연스럽게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엄마는 지금도 절기에 맞는 음식을 꼭꼭 만들어 주신다. 한 해를 시작하는 정월 대보름 오곡밥부터 끝자락인 동지 팥죽까지... 예전엔 글자 그대로  ‘음식’이었는데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그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밥은 잘 챙겨 먹어라.”란 말씀과 함께 ‘사랑’의 다른 형태였다.


<감자씨> 순지에 안료_31x31cm_2001(좌), <품다> 장지에 안료_33x21cm_2019(우)   엄마는 근원적인 '씨'처럼, 한없이 '품어' 주는 존재다.


초등학교 때 가장 행복했던 하루의 순간은 하교 후 엄마가 만들어 주신 간식을 먹으면서 소설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그때만 해도 방과 후 할 일이 별로 없어 책 읽기나 피구, 수영, 자전거 타기가 오후 일과였다(엄청 옛날 느낌이…^^). 배달음식도 거의 전무해 집에서 늘 ‘엄마표’ 간식을 먹었다. 수박화채, 토마토 절임 등 제철 음식을 중심으로 두껍게 썰은 감자와 닭튀김, 윤기 흐르는 고구마 맛탕, 식혜, 잣, 밤과 대추가 그득했던 약밥, 바삭하게 구어 꿀에 잰 찹쌀떡, 두꺼운 패티의 햄버거 등등…생각해보면 지금은 엄두도 나지 않을 음식들을 집에서 먹었다. 유치원 때 검정 물고기 떼 같은 것이 부엌에 있어서 한참을 보면서 신기해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추어탕 재료였다.


엄마의 음식 덕분인지 식습관이 비교적 좋다는 걸 중년에 이르러 체감했다. 감미료가 센 음식은 몸이 스스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인공적인 색으로 예쁘고 화려한 음식은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지만 손이 가지 않는다. 조리를 적게 한, 자연에 가까운 음식들이 맛있다. 가장 좋은 맛은 담백한 맛인 ‘대미 필담(大味必淡)’! 언니도 요리를 좋아하고 쌍둥이처럼 입맛이 너무 흡사해 서로 놀라곤 한다. 그런데 나의 아이들은 동성 자매인데도 입맛과 기질이 너무 달라서 ‘닮음과 닮지 않음의 사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주었고 이는 2012년 개인전 전시로 이어졌다.


<닮음과 닮지 않음의 사이> 개인전 도록_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_2012   엉켜있는 콩나물을 소재로 <닮음과 닮지 않음의 사이>를 표현하였다.


삼시 세끼를 준비하는 일상이 지겹기도 하지만 시장에서 식재료를 살 때는 계절의 순환이 느껴지고 활기가 솟는다. 재료를 이리저리 응용해보면서 새로운 조합과 변형에 스스로 감탄하면서 먹기도 한다. ^^


그림은 전통적 의미에서 ‘소유(collect)’가 분명한 예술 분야이지만 자식과 사랑은 소유하고자 하면 잃어버린다. 부모님은 자유 속에서 무한 애정으로 나를 품어 주셨고 그 사랑으로 나는 흔들리는 중심을 잡는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식구들을 살리는 ‘살림’과 나를 살리는 ‘그림’ 활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달팽이처럼 꾸준한 걸음으로, 작품 제목처럼 ‘따로. 또. 같이’ 삶의 풍경을 그려나간다.


<중심 잡기> 순지에 소목 염색, 콜라주_36x36cm_2006  바탕을 소목으로 붉게 염색 후 안료를 올렸다.


<걷다> 습식 벽화 기법에 소라 오브제_20x38x5cm_2001  민첩한 걸음은 아니지만 느려도 꾸준히, 한 걸음씩 나아간다.


<따로. 또. 같이> 장지에 들기름, 안료_135x130cm_2006  느타리버섯 윗부분을 추상화하여 표현하였다.


인생의 중반을 넘겼는데도 아직도 자신을 잘 모르는 아둔함이 많이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나중에 다시 이 글들을 읽으면 얼굴이 화끈거리겠지만…1997년부터 2022년 현재까지, 25년 동안의 작업들을 모아 글을 썼던 지난 5개월은 나를 돌이켜보는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http://www.hyeinch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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