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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봉수 Jul 17. 2024

<시집> 슬퍼도 황제처럼(8)

시 5편: 전쟁, 급체, 파혼, 도시인, 비둘기의 눈물

26.전쟁 - 오봉수

 

발정기도 아닌데 황소가

울타리를 부수고

무우밭으로 달려갔어요

 

황소는 미친 듯이 밭주인을 다치게 하고

땅을 헤집고 무우를 뽑고

밭을 황폐화시켰지만

진작 무우는 전혀 먹지 않았어요

 

놀란 마을 사람들은 경운기를 타고 와서

곡괭이와 쇠스랑으로 황소를 죽였어요

그래도 화가 덜 풀린 사람들은

소고기라도 먹어야겠다고 황소를 해체했어요

 

황소의 배를 가르니

늙고 욕심 많은 독재자가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었어요



27.급체 - 오봉수

 

약삭빠르게

숲과 바다를 파괴하여

부자가 된 남자의 집

변기가 꽉 막혔어요

 

유명한 변기 전문가 왔지만

돈만 쓰고 변기를 뚫지 못했어요

 

화가 난 부자는

직접 망치로 변기를 때려 부쉈어요

 

변기 밑에는

고장 난 양심과 욕심덩어리가

큰 바위처럼 뭉쳐 있었어요



28.파혼 - 오봉수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철수와 영희는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었어요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결혼을 약속하고

상견례를 하게 되었어요

 

세상은 좁다고

우연찮게 두 사람의 부모님은

같은 아파트 위층과 아래층에 살았어요

 

얼마 후

철수와 영희는 헤어졌어요

두 사람의 부모님은

층간 소음 문제로

칼부림까지 한

원수지간 이었어요



29.도시인 - 오봉수


 

오른손에는 핸드폰

왼손에는  반려견의 목줄

오른발에는 오른 굽이 심하게 닳은 고독을 신고

왼발에는 왼 굽이 심하게 닳은 결핍을 신고


카페인에  찌든 심장

알코올에  점령당한 간


무너질 것 같은 런웨이를

걸어가는 모델처럼

노을 지는 수변공원을

홀로 걸어간다 



30.비둘기의 눈물- 오봉수

 

만삭인 난

알을 낳기 위해 둥지가 필요해요

숲 속은 천적 때문에 두렵고

전봇대는 감전 위험이 있고

어쩔 수 없이 오래된 아파트를 찾아 헤매다가

10층 에어컨 실외기의 빈 공간에 전세를 구했지요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집을 짓는 동안

아파트 주인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웃고만 있었죠

나는 안심이 되어 둥지를 완성한 후

네 개의 알을 낳아 품고 있었죠

어느 날 배가 고파 먹이를 구하러

해안가 주변을 순찰 돌다가

갈매기떼의 공격을 받았으며

헛탕만 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난 기절을 할 뻔 했지요

아파트 주인이 베란다 물청소를 하면서

둥지까지 깨끗이 청소를 했더군요

난 실외기와 유리창문에 물똥을 투척하면서 항의했어요

 

"열 길 물속을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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