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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봉수 Jul 17. 2024

<시집> 슬퍼도 황제처럼(9)

시 5편 : 위 내시경, 씨앗을 심었다고, 야간근무, 등산, 악플

31.위 내시경 - 오봉수

 

매복한 암세포를 잡기 위해

카메라로 무장한 검은 뱀이

점령군처럼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철군할 때는

내 속에 발목지뢰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헛된 욕망과 외로움도

포로로 잡아서

데리고 가세요



32. 씨앗을 심었다고- 오봉수

 

씨앗을 심었다고

열매를 욕심내지 말자

 

열매의 주인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적게 주어도 많이 받을 수 있고

많이 주어도 적게 받을 수 있다

 

배려심 가득한 열매는

목마른 나그네와

배고픈 짐승에게

삶을 연장하는 생명줄이다.


33. 야간근무 - 오봉수     


야근이다

오늘밤 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자     

신발 끈 한 번 더 꽉 조이며 들어서는 

야망에 찬 도시의 등대 같은 경찰 지구대

근무복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세상의 모든 신에게 기도한다

아무도 상하는 사람 없이 내일 아침에 이르도록     

계곡 골바람처럼 매섭게 신고 접수가 몰려든다

지상의 모든 불평과 광기를 실토하듯 

바지에 오줌을 싼 주취자를 태운 112 순찰차를 밀고 당기는

새벽 세 시 무렵     

사흘에 한번 꼴인 밤샘근무로

내 몸은 물먹은 성냥갑처럼 

점점 빛을 잃어 가는데

벼락처럼 다시 울리는 

무전기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는 초생 달 같은 조각 잠     

절도범이 휘두른 칼에 크게 다쳐 명예퇴직을 신청한

소설 같은 노경(老警)이 말없이 건네주던 믹스커피 한 잔이

졸음을 털어내듯 새벽안개 사이로 보이는 것이

이 일은 내 사명이고 숙명이고 희망인 것이다     

살기 어린 범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용기와

꼬막처럼 주름진 할머니가

새벽 장으로 끌고 가는 유모차를

힘껏 밀어줄 수 있는 따뜻함인 것이다 


34. 등산 - 오봉수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일회용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신 후

산으로 올라간다


정상에서 보이는 것은 

악취와 절망뿐

땀 한 방울 나지 않고

등짝엔 소름만 맺힌다


깃발을 꽂으려는 사람도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도 없다

최대한 빨리 내려가야 한다

플라스틱 산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플라스틱은 악마의 선물

무절제한 사용은 재앙


35. 악플-오봉수      

     

익명 속에서

소리 없이 흘러

인정사정없이 목덜미를 문다     

출산 전 사슴 꽁무니를

몇 시간째 따라다니다가

어미 사슴이 지쳐 쓰러지자

숨통도 끊지 않고 배를 찢어서

새끼를 통째로 삼키는

코모도왕도마뱀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영혼까지 파괴시킨다


병든 물소를 사냥하기 위해

음낭을 꽉 물고 뜯어서

정체성까지 넘어뜨리는

점박이하이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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