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예비 엄마로서의 시간
여자는 언제부터 엄마가 될까.
보통은 아기를 낳는 순간부터 호적 상 자식이 생긴 때 엄마라는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임신을 하게 되고, 심장이 뛰는 한 생명을 뱃속에 품고 있는 40주의 기간 동안은.. 뭐라 할까.
산부인과 의사와 태아보험 상담을 하는 설계사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게 '어머님'이란 호칭을 붙인다.
아직은 엄마/어머님이란 호칭이 익숙하지 않다. 어쩌면 나는 엄마가 되는 중인 예비 엄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라는 단어 앞에 '예비'를 붙일 수 있을까.
예비(豫備)란 2가지 뜻을 갖고 있다.
1. 필요할 때 쓰기 위하여 미리 마련하거나 갖추어 놓음.
2.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거나 정식으로 하기 전에 그 준비로 미리 초보적으로 갖춤. 또는 그런 준비.
위 사전적 정의에 따른다면,
나는 임신 기간 동안 '예비 엄마'로
정식 엄마가 되기 전의 준비를 하며, 필요할 때 쓰기 위한 몸과 마음의 상태를 미리 마련하는 중이다.
임신 기간 동안 그렇게 나는 완전한 여자도 엄마도 아닌 경계선에 서게 되었다.
그 경계선에서 크게 3가지의 변화의 갈림길이 생겼다.
1. 엄마로 변하는 몸
임신을 하면 당연히 배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튼살크림도 미리 사다가 틈틈이 발라주었다.
하지만 가슴이 커지고 골반이 벌어지면서 골반 등의 통증이 생기는 건 상상하지 못했다.
허리를 숙이거나 왼쪽 다리를 들 때면 골반 쪽이 전기에 감전되듯 찌릿하게 아팠다. 너무 아파서 '악!'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얼어붙기도 했다. 참다 참다 한의원에 가서 침이라도 맞으려고 했다.
그전에 혹여나 싶어 산부인과를 갔고, 아직 20주가 넘지 않았음에도 더러 골반 통증을 느끼는 엄마들이 있다고 했다. 원래 허리가 안 좋거나 골반이 틀어진 경우 아플 수도 있다고 말이다.
아기가 있을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호르몬 등으로 신체 구조가 변하는데, 그 과정에서 골반이 벌어지면서 통증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아프면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는 등 처치를 해도 좋지만, 파스는 절대 안 되며 약을 먹기보다는 찜질을 해주라 얘기를 들었다.
아파도 편히 약을 먹지 못하는 몸으로 해결할 수 없는 통증으로 절뚝이며 걸을 때의 참담함이란.
아직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만삭처럼 어기적어기적 걷게 되는 이 통증으로 인해, 스스로의 모습이 조금은 바보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출근해서 사무실을 걷다 통증에 절뚝이고, 찌릿한 고통에 나도 모르게 몸서리칠 때는 '그냥 집에 누워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고통에 아프기도 했다가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에 창피하기도 하면서 한동안 출근하는 게 괴로웠다.
또한, 부푸는 가슴과 배로 인해 속옷을 바꾸는 등 불필요한 지출을 해야 했고 이 때문에 오래 앉으면 허리도 욱신거리며 아팠다.
맘 카페엔 임신 기간 내 주차 별 톡방이 있는데, 내 주차의 이런 신체적인 변화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글을 읽었다. 배가 많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밤에 잠을 자기도 쉽지 않고, 자다가 깨면 다시 잠들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누군가 이런 상태에 대해, 나중에 엄마가 밤중 수유와 아기를 돌볼 때를 대비해서 미리 경험하게끔 겪는 건지도 모른단 글을 봤다. 과학적이진 않지만 진화(?)적으로 볼 때 그럴듯했다.
마치 물속에 살아야 하는 동물들에게 아가미가 생기는 것처럼,
여자가 엄마로 진화하기 위해선 엄마로서 겪는 것들에 대해 단단해져야 할 테니까 말이다.
2. 워킹맘을 준비하는 회사생활
나는 근무 중인 회사에서 사회초년생을 지나 나름의 경력직이 되었다.
개인에 대해 자율과 책임이 명확한 회사였기에 배울 것도 많았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1년 차에는 돈을 받으면서 일을 배우는 입장이었다면, 2년 차에는 일에 적응하며 업무 요령을 익혔고
3년 차에는 제대로 된 내 일을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이제 4년 차로 나름 회사에서 효율적으로 원활하게 일을 처리하는 입장이다.
가르칠 후배도 생겼고, 동료 선배와 함께 상품을 개발하고 영업하는 등 새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시기다.
어쩌면 앞으로는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아닌,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내야 하는 경력을 쌓은 때 잠시 경력을 멈춘다는 건 시원섭섭한 일이었다.
언제 회사를 다니며 1년을 휴직해보겠냐는 생각이 들다가도, 육아휴직은 절대 쉼이 아니라는 말에도 동의했다. 그럼에도 회사 일이 아닌 나를 필요로 하는 아기와 가족에 시간을 쓰는 일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래서 임신 초기에는 얼른 36주를 보내고 휴가와 육아휴직을 붙여 쓸 계획에 즐거웠다.
하지만 임산부로 업무를 보면서 이런 내 기대는 불안함과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내가 남기고 갈 것과 돌아왔을 때 남아 있을 것에 대한 고민들로 말이다.
회사에서 업무는 크게 2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과제 중심적 업무와 관계중심적 업무.
우리 회사의 과제는 그 자체를 이슈 없이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며, 주어진 목표 달성에 원활하게 달성하도록 매니지먼트/기획을 하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에, 4년 차인 나는 나름대로 무리 없이 일을 해낸다.
하지만 휴직 후 돌아왔을 때도 내가 해낼 수 있는 업무가 그대로 있을까? 아닐 것이다.
변화된 업무를 익히고 다시 능숙하게 처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잘 적응하고 잘 돌아와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막연한 부담감도 벌써부터 불쑥불쑥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 회사는 월말이 되면 바쁘기 때문에, 모두 야근을 하며 저녁을 함께 먹고 술을 마시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나름의 전우애가 생기기도 하는데, 함께 월말 야근이나 저녁 식사를 동료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에 아쉽기도 했다. 저녁 술자리가 많은 회사 분위기 상 워크숍이나 술자리를 참여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동료와 좀 더 친해질 시간을 놓치는 셈이다. 게다가 지금 친하게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이 이직하지 않고 회사에 머물지도 알 수 없다. 돌아왔을 때 나는 내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일할 수 있을까? 모르는 일이다.
그런 사이 시간은 흐르고, 나는 내 자리에 짐이 더 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4개월 뒤면 비울 자리를 깨끗하게 쓴다. 이제는 잠시 떠날 사람이고, 돌아오더라도 예전처럼 새벽까지 술을 마시거나 일상의 대화 주제가 겹치지 않는, 함께 놀기 어려운 워킹맘이 될 테니까.
3. 조금 더 이기적이어도 되는 시간
갑작스럽게 시어머님께서 종아리 쪽을 다치셨다. 그래서 이번 설에 음식은 어떻게 해 먹었으면 좋겠냐는 말씀에 전이나 음식을 해 먹기보다는 사 먹자는 의견을 눈치보다 낼 수 있는 건,
편찮으신 어머님만큼 나도 몸을 신경 써야 할 임산부이기 때문이다.
평소 친정 엄마가 밥을 먹으러 갈 때도 가장 편한 안쪽 자리를 엄마에게 양보했다면, 이제는 내가 당당하게 먼저 앉는다. 엄마 역시 이제는 익숙해진 듯 내 손에 들린 짐을 대신 들어주려고 한다.
남편 역시 평소보다 나를 좀 더 신경 써 주고, 회사에서도 코로나가 심해지면 먼저 재택근무를 권하기도 한다.
처음엔 이런 관심과 배려에 어색하기도 했다. 뭐든 빠릿빠릿하게 먼저 행동하려는 성격에, 급하기도 해서 몸이 먼저 움직이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빠르게 뛰거나 물건을 옮기기도 힘들었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서 한 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아기를 품은 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기 위해서.
이는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때부터 알고 지냈지만 잘 맞지 않던 친구가 있었다.
메신저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되었다. 사람이 나쁘진 않으나 서로 성향이 달랐다.
지금까진 의리로 보낸 시간이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서로 임신을 하면서 관심사 주제가 통할 때가 많아졌다.
역시나 조금씩 어긋나는 느낌의 대화 속에서 서로를 맞춰가는 대화를 나누는데, 어느 순간 너무 피곤해졌다.
사이가 나빠지기보다는, 모르는 척 트러블 없이 잘 지내는 것에 의미를 두곤 했는데.. 지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아마도 내 마음을 편안한 상태로 스트레스 없이 지켜내야 한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아기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기에. 그래서 그 친구와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관계가 흘러 지나가도록 했다. 이제는 나와 아기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하며 조금은 더 이기적으로 굴고 싶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며 눈치 보던 내 모습에서 벗어나서, 엄마로서 나와 아기를 우선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렇게 나는 엄마로서 필요할 때 쓰기 위한 몸과 마음의 상태를 미리 마련하는 중이었다.
변화되는 몸을 최대한 스트레스 없이 받아들이며 아프거나 힘들 땐 욕심부리지 않고 쉬고,
직장에서 내 몫을 다하되 곧 있으면 떠날 자리를 정리하며 업무와 관계에 임하고,
남의 눈치 보던 시간을 줄여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기분을 우선한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