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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작가 Feb 24. 2022

역할놀이 안에서 마음 거리두기

10. 가까이 두기-멀리 두기

브런치에 임신에 대하여 글쓰기로 마음먹은 건 2가지 이유였다.

첫째는 소중한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생애 처음으로 엄마가 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싶었다. 

두 번째는 나를 살피기 위해서다. 어쩌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한 여러 고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 걱정과 불안의 감정선 끝에 존재하는 내 마음이 진정 무엇일지 주의 깊게 열어보며, 차분하게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싶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의 고민을 기록한다는 것이 꽤나 거창해 보이기도, 꽤나 머리 아프게 사는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한다. 사실 내 글에도 묻어나는 것처럼 나는 머리 쓰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고민하고 걱정하고 또 고민하고 계획 짜고..!

극 효율을 추구하는 INTJ의 특성 일지, 철학을 즐기는 인문학도가 찐 적성이었는지, 머리 아프게 고뇌하는 것이 적성에 맞았다. 일하듯 마음을 정리하는 일도 이성을 활용하여 가장 최상의 감정을 만들고자 한다.


좌우 두뇌의 열띤 사유를 형상화한 것 같다.!


마음은 신기하게도 글과 비슷하다. 자꾸 생각하고 고민할수록 자잘한 감정과 핑계가 사라지고, 명쾌하고 깔끔해진 진짜 속마음이 한 문장처럼 남는다. 나는 어떤 엄마가 되고 싶기에 자꾸만 이런저런 걱정이 드는지..

사실 누구나 처음에는 완벽한 원더우먼이 되고 싶다. 일도 사랑도 살림도 육아도.

하지만 현실의 땅을 딛고 사는 인간이라면, 완벽의 한계를 금방 깨닫게 된다. 우리에겐 힘과 스피드가 넘쳐나는 원더우먼의 초능력도 마음껏 하늘을 나는 망토도 없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인정하기로 했다. 
든 걸 잘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인정하는 대신, 내가 원하는 엄마의 역할을 잘 갖춰가고 싶다.


나는 인생을 하나의 역할놀이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나'만 알던 한 인간이 성장하고 사회화되면서 여러 역할을 부여받는다. 가족 안에서 딸/아내/며느리의 역할을 가질 수도 있고, 사회 조직 안에서 마케팅 플래너/선배/후배의 역할을 받을 수도 있다. 역할이 늘어날수록 역할에 맞는 내 태도가 가면처럼 생겨났고, 평면적이었던 내 자아 역시 다각도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임신을 하면서 엄마라는 역할을 새로 부여받은 기분이다.

모든 역할을 품을 때의 마음이 똑같듯, 엄마의 역할 역시 잘 해내고 싶었다.

크게 그려보자면, 현재의 내 역할은 위와 같은 육각 도형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엄마의 역할을 그토록 욕망하는 것일까. 무수한 걱정과 불안을 가질 만큼 도대체 어떤 엄마가 되길 욕망하는가.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물어봤고, 여러 핑계와 그럴듯한 거짓말 사이로 내 진짜배기 속내를 사유했다. 임신을 알게 된 첫 순간부터 지금 내 뱃속에 꼬물대는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지금까지, 임신 기간의 절반이 지나고서야 그 속내를 찾았다.


'완벽' 대신 '최선'을 다하는 엄마,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우선하는 엄마
그리고 '회복탄력성'을 길러주는 엄마

모든 게 완벽하길 바랐다. 건강하면서도 똘똘하게,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최상의 것만 챙겨주고 싶었다. 그래서 식단부터 커피, 태교부터 태아보험 등.. 매주 임신 주차마다 새로운 걱정거리를 사서 걱정하기도 했다.

욕심이 많아지다 보니, 여러 역할 안에서 경계를 잃고 방황하기도 했다. 임신 후 컨디션에 따라 회사에서 쏟아지는 잠에 휘청이기도 하고, 긴 미팅 후 퇴근길에 졸음운전을 하지 않도록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시댁에서도 밥 먹고 나면 설거지라도 도와야 지란 생각이 드는 며느리지만, 임산부니 배려도 받고 싶은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마음이 혼잡할 때면, 나는 역할놀이 안에서 거리 두는 연습을 하곤 한다. 

하나의 역할에 집중하며 다른 역할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다. 불필요한 마음 쓰기를 줄여가는 훈련이랄까.

업무에 집중이 안 될 때는 과감히 잠시 멈춤을 시도한다. 잠시 복도나 회사 밖으로 도망치거나 휴가를 쓰고 회사원의 역할을 잠시 내려놓기도 한다. 운전 중 커피를 마실 때는 엄마의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안전운전에 집중한다. 며느리로서의 음식을 할 때 도울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돕되, 엄마로서 무리가 간다 싶으면 눈치를 숨기고 명절에 나가서 먹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모든 역할을 완벽히 다 잘 해낼 수는 없지만 하나의 역할에 충실해지는 것. 그리고 복잡한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렇게 마음을 살피기 시작했고 자잘한 걱정이나 불안을 없애갔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엄마의 역할이 다듬어졌다. '완벽' 대신 '최선'으로.

내 나름대로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후회 없이 다했다면, 그것이면 충분하다로.

엄마로서 자식에게 바라는 건 사실 하나의 간단한 문장이다.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서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꾸려나가길 바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 나는 엄마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 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된다. 일이든 글이든 복잡해질 때면 이렇게 단순하게 가지치기를 하는 게 도움이 된다. 어쩌면 이런 역할 놀이를 생각하고 그 안에서 마음 거리 두는 연습을 하는 건, 스스로가 쉽게 상처받지 않도록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향적인 성격으로 살면서 강인한 정신력을 기르기 위한 최고의 관심사는 언제나 회복탄력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자식에게도 쉬이 상처받지 않고 단단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건강한 회복탄력성을 길러주고 싶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고, 기왕 사는 거 잘 먹고 잘 살고 싶다. 나도 내 가족도. 

긴 삶의 여정 속 무수한 역할의 갈림길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선, 길을 잠시 이탈해도 방향을 바로잡고 되돌아올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방향을 잡는 기준점은 위 육각 도형의 역할놀이 안에서 나름의 적당한 경계면에 서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뿐이다. 어느 하나에 마음 쓰는 걸 가까이 두기도, 멀리 두기도 하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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