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가진 집에서 살았던 추억이 거의 없다. 초등학생 때 흙 마당이 있던 집에서 잠시 살았는데, ‘케리’라 불렸던 검은 세퍼트 개와 뛰어놀았던 기억이 전부이다. 그 외는 대문과 현관 사이에 작은 공간은 있었지만, 이를 마당이라 부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작은 집이었다. 마당이라고 할 수 없는 그 공간은 시멘트 바닥으로 된 통로였다.
당연히 마당을 추억할만한 유년 시절이 없다. 다만 흐릿한 기억으로, 명절날 시골 할아버지 댁에 도착하면 우리를 보고 잰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오시던 할머니의 환한 모습 전부일 뿐. 리(里)로 끝나는 어느 촌에 살고 있던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면, 목련 꽃잎보다 하얗게 빛나던 흙 마당의 정갈함이 포근했었다.
내게는 차라리 마당보다는 골목길이 더 정겹다. 골목길에는 흔히 평상이 있었는데 주로 동네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의 보금자리였다. 할아버지나 아저씨들이 감히 넘볼 곳은 아니었다. 마당이 가족의 소통 공간이라면 골목길의 평상(平床)은 마을공동체의 소통 공간이었다. 이제 흙 마당과 골목길에 놓여 있던 평상(平床)은 명멸해 가는 희귀종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대신 그 자리엔 자본의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전원형 잔디 마당과 넓은 콘크리트 주차장을 갖춘 차가운 아파트로 가득하다.
주말만 되면 유홍준의 ‘나의 문화 답사기’를 가방에 넣고 사찰들을 찾아다녔던 적이 있었다. 여러 절집을 다녀보니 법당과 요사채는 크기만 다를 뿐, 반복되는 변주처럼 생김새는 유사했다. 하지만 절집 흙 마당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사찰마다 기운이 달랐다. 마당의 기운으로 그 절의 선풍을 느낄 수 있었다. ‘텅 빈 충만한’ 기운이 가득한 마당과 그저 비어있는 마당은 차이가 완연했다.
어느 해 늦가을. 해 질 녘, 어스름한 시간에 조계산을 넘어서 송광사에 도착했었다. 이미 산 그림자는 길어지고 법당을 향해서 스님들은 기러기 무리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맑은 소리가 절 마당에 퍼지고 있었다. 종루에서 중생들의 깨달음을 염원하는 사물이 의식에 따라서 차례대로 울리고 있었다. 처음 접하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나는 예불이 끝날 때까지 대웅전 앞마당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어두운 하늘도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고 대웅전 앞마당도 한없이 넓어졌다.
산사의 마당에서 볼 수 있는 곡선의 빗질 흔적은 맑고 고요하다. 이른 아침 청소가 끝난 마당에는 고운 빗질 자국이 가득하다. 두 방향으로 갈라진 빗질의 유선형은 흙마저 선정에 들게 하는 것 같다. 흙 마당이 보여주는 미학이라고 할까?.
정감 어린 마당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고작 고택(古宅)이나 사찰 정도에만 남아있다. 이제 흙 마당은 한국민속촌이나 낙안읍성에 가야만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흙이 깔렸다고 운동장이나 연병장을 우리의 마당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마당이 사라진 공허함을 대신하려는 듯 공원들이 이곳저곳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 공원은 정책 사업과 단체장들의 공약이 낳은 창백한 박제의 공간이다. 주변의 공원은 건강을 위하여 분투하는 걷기 현장일 뿐이다. 그곳에는 함께 나누고 싶고 듣고 싶은 삶의 이야기가 없다.
스페인어에 ‘퀘렌시아’란 말이 있다. 투우장에서 투우사와 사생결판을 내는 성난 소가 숨을 고르는 장소를 뜻한다. 소는 그곳 퀘렌시아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도전의 향한 에너지를 비축한단다. 즉 기운을 되찾는 장소이다. 우리에게도 퀘렌시아은 필요하다.
욕망의 뜨거운 숨결로 가득한 광장이나 무성한 풀만이 자라는 박제된 공원을 ‘퀘렌시아’라고 부르기에는 마땅치 않다. 흙이 깔린 마른 마당. 반사되던 빛마저 하얗던 눈부신 한낮의 마당. 텅 빈 공허감으로 오히려 편안했던 마당. 어쩌면 정결했던 예전 선조들이 살았던 마당이야말로 우리의 ‘퀘렌시아’는 아니었을까?
휴일이면 우리는 각자의 ‘퀘렌시아’를 찾아 떠나간다. 마당을 상실한 세대들이 찾아가는 ‘퀘렌시아’는 어디일까? 주말 오후, 퀘렌시아를 찾아 헤매다 집으로 돌아오는 이웃들의 처진 어깨가 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의 정갈하고 포근한 마당처럼 우리 곁에 퀘렌시아가 있으면 좋겠다. 그것마저 어렵다면 마음속에서라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