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보고 '예쁘다'라거나 '잘 생겼다'라고 느꼈던 적이 거의 없다. 연예인도 마찬가지다. 실물을 만나보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얼굴 평가는 아니고 본질적으로 얼굴에 별로 관심이 없다. 내 얼굴도 아니고 남의 얼굴에 뭐 그리 관심을 가지나 싶다.(내 얼굴에도 별 관심이 없긴 하다.) 다른 사람들이 예쁘다면 이 얼굴이 예쁜 얼굴이구나, 잘생겼다면 잘생긴 얼굴이구나 하는 거지 못 생겼다는 사람도 그렇게 못 생겨 보이지 않고 잘 났다는 사람도 크게 차이나 보이지 않는다. 당사자에겐 미안한 말이겠지만 컴퓨터미인이라는 얼굴들이 왜 미인인지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그냥 성품이 좋아 보이면 좋은 사람, 제 할 일을 잘하면 멋진 사람인 거다. 좋아하고 아끼는 내 사람은 더 사랑스럽고 예쁘고 잘 모르는 사람은 그냥 평범하다.
그런 내가 사람에게 흠칫 놀란 적이 두 번 있다. 시골버스를 타고 있다가 버스에 오르던 여자가 눈에 잠깐 스쳐 지나갔는데 급히 고개를 돌려 그녀의 궤적을 따라 온몸을 돌려 쳐다봤다. 나외엔 다른 누구도 그 여자를 보고 있지 않았던 걸로 보아 엄청난 외모는 아니었던 듯한데 왠지 모르게 '헉'하는 분위기와 매력이 있었다. 뚫어져라 보기엔 민망해 등을 돌렸지만. 남자는 여자를 보고 여자도 여자를 본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인듯하다.
또 한 번은 TV를 볼 때였다. 하릴없이 리모컨을 누르는데 케이블방송 수백 번대로 넘어가도록 멈추지 않았다. 1,2초 간격으로 채널이 쉼 없이 넘어가고 있었다. 무의식 중 채널 버튼을 또 누르다 갑자기 이전 채널로 돌아갔다. 외화 드라마였다. 아는 사람도 아닌데 방금 잠깐 지나간 여자가 누군가 싶어 잠자코 보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단발머리가 경쾌해 보였고 뚱한 표정도 매력 있었다. 프로그램을 끝까지 보고 다음화부터 챙겨보기 시작했다. 제시카 알바가 출연한 <다크엔젤>이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각본을 맡아 처음 TV시리즈에 진출한 SF물로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간 이 작품은 테러리스트로 황폐화된 2019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2000년 방영 당시 20여 년 후를 상상해 만들었을 텐데 그게 5년 전이라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일상의 변화는 미미하고 상상력은 항상 시대를 앞서 나간다.
미국에선 당시 무명이던 제시카 알바를 탑스타로 만드는 계기가 된 작품이지만 국내에선 아는 사람이 많진 않다. 그래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제시카 알바의 리즈시절이라 호평받는다. 시즌 2를 찍을 당시 제시카 알바는 더 이상 무명이 아닌 유명 배우로 각인되었고 제작비 부족으로(에피소드 한편당 200만 달러 이상 소요) 내용이 완결되지 못하고 흐지부지 사라졌다. 이야기가 산으로 가면서 시청률이 안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끝나지 못한 이야기가 아쉬운 사람은 나뿐인가 싶기도 하다.
이 드라마의 키워드는 이런 것들이다. 국가기밀, 유전자연구소, 유전자 조작, 인간병기, 초인적 두뇌와 체력, 시설에서 탈출, 흩어진 친구 찾기, 조직의 끈질긴 추적, 살기 위해 계속 필요한 약.
지금이야 비슷한 모티브의 영화, 드라마가 많이 나와서 이미 대강의 내용이 짐작될 것이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 택배운송업의 활성화를 예상했는지는 모르나 자전거를 타고 물건을 배달하는 게 주업무인 주인공 맥스가 자신의 힘을 숨긴 채 살아간다. 밤에는 특수한 능력을 이용해 미술품등을 훔치며 사는데 우연히 해적 방송(아이즈온리)을 통해 세상의 부정과 싸우는 로건을 만나면서 서로 돕게 된다. 완벽한 실험체인 그녀를 찾으려는 조직의 추적을 피하며 10년 전 최강의 병사로 훈련받다 함께 탈출한 친구들을 찾으며 싸워 간다.
특히 이 드라마는 일반적인 남녀의 성역할을 뒤집으며 사고로 휠체어를 타며 정보를 제공하는 로건과 직접 현장에서 다양한 액션들을 소화하는 여주인공 맥스를 내세우는 점이 독보적이었다.
내가 좋아한 뚱한 표정들
19세 풋풋한 모습의 제시카는 연기력은 부족했을지 모르나 신선하고 이국적인 매력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멕시코계 미국인 아버지와 캐나다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히스패닉과 아시안 등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는 듯한 얼굴이라 더욱 친근한 느낌으로 대중에게 다가가 사랑받은 것 같다고 스스로 이야기했다.
이후 여러 영화에 출연했지만 연기력 논란과 함께 최악의 영화와 배우를 선정하는 '골든 라즈베리상'에 2006, 2008, 2009년에 후보로 올랐고 2011년엔 최악의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 무렵 받는 평가와 자기 자신을 분리하지 못해서 연기를 너무 싫어했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애달프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건강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의 사업가로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알러지가 있던 그녀가 출산 후 아기세제를 사용하며 알러지가 더 심해지자 스스로 독성물질에 대해 공부했다. 하던 일이나 잘하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3년여간 투자자를 찾아다닌 끝에 여러 투자자들과 함께 2012년 어니스트라는 친환경 소비재기업을 설립하고 미국, 유럽에서 지정한 1300여 개 유해물질을 사용하지 않겠다 약속했다. 관련법 개정에까지 앞장서며, 유명인의 인지도로 돈 되는 사업을 하는 대신 스스로 경험하며 알게 된 필요를 채우는 일로 점점 더 인정받는 모습이다.
지난주 이 글을 쓰며 마음이 불편했다. 외모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오히려 다른 사람의 삶을 폄훼하는 글이 되는 건 아닌가 싶어 주저하다 발행을 포기했었다. 그럼에도 다시 글을 올리는 것은 그동안 너무 고결한 척 한 것 같아 스스로 만들어낸 틀을 벗어내려는 것이다. 모든 성공 뒤에는 실패가 있고,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바르게 흘러갈 거라는 믿음 덕분이기도 하다. 제시카 알바는 말한다. "There are a thousand no's before one yes." 연기력 논란에도 꾸준히 노력하며 조금 더 나은 연기, 조금 더 나은 모습을 보이는 그녀처럼, 부족해도 좌절해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의 품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