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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Feb 29. 2024

본다는 건

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미디어에 익숙해진 탓인지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이제껏 읽은 대하소설이 여러 작품이긴 하지만 지금은 몰입이 잘 안 된달까. 그렇지만 강렬하게 남은 책을 꼽자면 소설이라는 게 아이러니다.


수십 년 전에 본 것 같아 발매일을 찾아봤더니 2002년이다. 더 오래전인 학창 시절에 읽은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아닌가 했더니 1998년 발매 후 재발매된 듯하다. 작품의 수위를 보자면 사춘기 청소년이 보기엔 좀 과한 부분이 있다. 그 강렬함 때문에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는 작품이 된 듯 하지만.



2008년에 동명 영화로도 제작되었지만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지 않았다가 맞는 표현이려나? 책이 영화나 드라마화되면서 각색되거나 감독의 의도에 따라 편집되는데 아무래도 원작을 읽고 보면 더 낫다고 느끼기보다 별로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잘 만들어야 원작이랑 비슷하다는 정도일까. 영화가 실망스럽다는 평에 기대감이 사라졌기도 하고, 소설로 보았던 잔혹한 장면들을 실제 마주해서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덕분이다.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199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이 책 <눈먼 자들의 도시>는 1995년 발간되었고, 영어판은 1997년 발간되었다. 따라서 당시 신간이었던 탓에 노벨위원회의 심사에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고 하니 다른 작품은 얼마나 탁월한가 궁금증이 든다.


주제 사라마구는 쉼표와 마침표 이외에는 문장부호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그나마 번역판에는 옮긴이가 설명을 위해 괄호를 사용하긴 하지만) 챕터 구분도 없고 문단과 문단 사이가 공간 없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대화와 대화 사이, 대화와 독백 사이, 대화와 해설 사이 등에서 줄 바꿈을 하지 않다 보니 처음 접하는 독자는 당황하게 된다. 화자와 상황이 쉽게 구분되지 않기에 책을 읽다가 잠깐만 한눈을 팔면 책의 흐름을 놓치기 쉽다. 그래서 다른 소설에 비해 더 집중해서 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독특한 문체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있는가 하면, 적응하지 못한 독자들은 책 읽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이게 대화글이라니!


또한 도시나 나라, 이름 같은 고유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이름 대신 '안과의사의 아내', '안과의사',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아내', '검은 색안경을 쓴(썼던) 여자' 등으로 부른다. 지역색과 인종적 특성도 드러나지 않으니 사건이 일어나는 도시가 어디라고 특정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이 사건이 독자가 사는 도시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비화나 과거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다. 오직 현재의 순간순간을 포착하며 이야기가 흘러간다.



사실 오래전이다 보니 내용이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모두가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 혼자 모든 것을 바라보고 감당해야 하는 주인공의 상황이 무섭게 머리에 남아있을 뿐. 다시금 살펴보니 더 무섭고 역겹고 잔인하다.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남자가 눈이 멀었을 뿐. 운전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며 눈먼 남자를 도와 병원에 데려간 사람이 눈이 멀고, 눈먼 사람들이 치료받으러 온 안과의 의사가 눈이 먼다.


바이러스처럼 주변 사람들이 차례로 실명되는데 그 속도가 놀라울 정도다. 정부는 이들과 접촉한 모든 사람을 열악한 환경의 폐기된 정신병원에 격리하는데 시력을 잃지 않은 의사의 아내도 앞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짓말로 남편을 따라 격리장소에 간다.



정부는 이 사태를 전염병으로 간주하고 격리 장소를 벗어나는 환자는 가차 없이 사살하며 심지어 환자들끼리 서로 죽여도 간섭하지 않는다. 폐병원을 멀찍이 둘러싼 군인들은 자신들도 감염될까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일부러 경고한 선을 넘도록 유인하기도 한다.


2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격리되는 동안 오직 의사 아내 한 명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모든 것을 목격한다. 주기적으로 식량을 받을 뿐, 돌봐줄 보호자나 의료 관계자도 없이 방치되는 사람들에게 의사 아내는 조금씩 도움을 주고 이끌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눈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질까 무서워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부려먹거나 해를 끼칠지 모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며 병원엔 존엄을 잃은 사람들만 가득하다. 처음 눈먼 사람을 병원에 데려갔지만 그의 차를 훔쳤던 남자는 검은 색안경을 낀 여자를 추행하다 구두에 찍힌 상처가 곪아 약을 요청하러 밖에 나갔다가 사살된다.

눈먼 사람만 수 백 명이 살면서 목욕이나 청소 같은 일상생활마저 안 되다 보니 아무 곳에서나 볼일을 봐서 오물이 가득하고 환기도 못해 악취가 진동한다.



눈먼 사람들이 계속 몰려 들어오며 부족했던 식량 배급이 끊기고, 남은 식량도 총을 가진 불량배들에게 빼앗긴다. 폐병원은 혼음, 불량배들에 의한 강간과 살인이 만연하다. 불량배들은 보석이나 여자를 바치면 독점한 음식을 조금씩 주며 군림하는데 처음 일부 자원자가 불량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식량을 받아오지만 불량배들의 만행은 계속된다. 의사 아내 역시 눈이 멀쩡한 것을 숨기려 불량배들에게 성추행을 당하지만 결국 불량배 두목을 가위로 죽이고 패거리를 물리치다 병원에 불이 난다.


불을 피해 병원을 나가니 지키던 군인들 역시 눈이 멀어 떠나버리고 실명은 이미 바깥 모두에게 퍼진 상태다. 수십 명의 환자들은 각자 흩어지고, 의사 아내는 초기에 시력을 잃고 함께 병실을 썼던 몇 명(남편인 의사, 검은 색안경 낀 여자, 처음 눈먼 남자, 사팔뜨기 소년,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을 집으로 데려간다.


도시는 말 그대로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어 식량과 물을 확보하려는 눈먼 사람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다 기력이 다하면 쓰러져 죽고, 개들은 길거리의 죽은 사람들을 뜯어먹는다. 길거리에 널린 배설물과 쓰레기. 도시는 제 기능을  못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정글로 변한 상황에서 지쳐가던 일행은 눈물 닦아주는 개 한 마리를 만나며 위로를 받는다.


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골로 떠날 것을 고려하던 중,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눈이 보이고 눈이 멀었던 순서대로 다시 시력을 되찾는다. 의사의 아내는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는 하늘을 올려 보다 이제 자신의 차례일 거란 두려움에 눈길을 떨구지만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라는 문장과 함께 이야기가 끝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 본성의 부정적인 모습을 고루 비추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무도 보는 이 없다 느낄 때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끌어올린 답은 우리 안에 이름 없이 숨은 무언가. 바로 악마성이다. 타인의 시선을 느끼지 않을 때, 모든 가치와 도덕적 기준이 무너지는 모습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폭력을 서슴지 않고, 폭력 옆에 기생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며 성욕, 식욕, 배설욕 등 자신의 욕망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가득하다. 단 한 사람에게 남은 마지막 인간성으로 함께 하려 애쓰고 남을 돕고 배려한다. 시야가 아는 것이라고도 한다. 원제(Ensaio sobre a cegueira)를 직역하면 '눈멂에 관한 수필'이지만 cegueira에는 무지라는 뜻도 있다 한다. 눈이 트이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한다.


딱 한번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를 눈먼 사람이 이끄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도시의 큰 슈퍼마켓에서다. 집은 구했지만 식량이 부족해 의사와 의사 아내가 개와 함께 음식을 구하러 슈퍼마켓으로 갔는데, 이미 슈퍼마켓 안으로 두 사람과 같은 생각으로 몰려들었다가 압사당한 사람 무더기가 있다. 도깨비불까지 보일만큼 썩어 문드러진 수많은 사체 더미를 보고 충격을 받은 그녀는 정신을 놓고 길을 찾을 수 없는 지경이 되는데, 눈이 멀어서 눈앞의 참사를 알 리 없는 의사가 아내의 손을 잡고 달래며 슈퍼마켓 밖으로 끌어내주는 장면이다.


눈을 뜬다는 건 고통스러운 현실과 마주하는 것이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고, 보기 때문에 수고스러운 일이 한없이 많다. 잘 보인다고 함부로 나서다가 몰매를 맞을 수도 있다. 차라리 안 보이고 모르면 편하다.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면 그뿐이다. 그러나 자각하는 사람들, 이타적인 그 몇의 수고로움으로 부패한 본성들이 조금 덜 부딪치며 하루를 산다. 보이는 것에 좌절하지도, 외면하지도 말자. 어쩌면 당신은 유일한 희망일지 모른다. 서로를 바로 바라볼 수 있기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볼 수 있건만 보기를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덧: 작가의 속편 <눈 뜬 자들의 도시>도 있는데 정부의 무능함에 눈뜬, 지식이 생긴 사람들의 정치 이야기라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질문은 사라지고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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