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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Apr 24. 2023

시작, 그 피곤한 여정(1)

처음부터 왜 이래?

시작은 새로운 만남에 대한 피곤함이었다.

3년여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챙기는 일을 해온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상황이 지독히도 싫었다. 새로운 만남에 숨죽인 한숨이 푸욱 새어 나오고 얼굴만 봐도 피곤하고 지쳤다. 새로운 만남이 싫다한 들 평생 새로운 인연을 안 만들 것도 아니고 계속 있기엔 갑갑했던 차에 친구가 워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참 유행이라 서른 되기 전에 갔다 오라며 다들 등 떠밀고 있었고 아는 지인을 소개해주며 뉴질랜드도 권하는 이도 있었건만 아무 연고 없는 호주가 마음에 들었다. 지친 와중에도 마음의 힘이 남았는지 네가 깨지나 내가 깨지나 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만남을 할 수밖에 없는 외딴 나라에서 부딪혀보기로 했다.



원체 겁도 없고 대책도 없기도 해서 가볍게 떠났다. 편도 비행기표에 미리 알아본 셰어 숙소 연락처와 주소, 그리고 청개구리 심보로 영어 대신 짧게 익힌 일어, 중국어 실력. 캠핑 가듯 백팩에 침낭과 옷가지, 세면도구가 전부였다. 여비라고는 편도 티켓을 끊고 남은 150여만 원을 환전한 게 전부였다. 출국하는 비행기부터 지각을 해 낭랑한 목소리 스튜어디스 언니의 전화를 받으며 허겁지겁 출발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희망찼고 경유한 콸라룸푸르는 상쾌하고 싱그러웠다.







여름에서 겨울로 날아와 호주에서 첫날 묵은 유스호스텔은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남녀혼숙 도미토리였다. 빠른 일몰에 커튼 쳐진 깜깜한 방 안에서 빈 침대를 찾아 헤매다 겨우 시트를 씌우고 가방에서 뽀시락뽀시락 짐을 꺼내는 작은 동양여자에게 기다란 반라의 서양남자들은 시끄럽다는 격한 욕설로 첫인사를 갈음했다. 스스로 고양이소굴을 찾아온 쥐가 된 듯 위축된 밤. 이제 정말 시작이다.



그날은 연휴의 첫날이었다. 연휴가 되면 도시의 대부분이 멈춰버리는 것도 모른 채 겁 없이 도착했더니 챙겨간 셰어주소는 거짓이었고 이미 호스텔에선 퇴실을 해 묵을 곳도 갈 곳도 없었다. 평일이었으면 도서관 인터넷 덕을 봤을 테지만 길거리를 헤매다 겨우 발견한 인터넷카페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다음 일정을 짜고 있었다. 무심코 옆에 내려놓은 지갑케이스의 핸드폰은 누군가 제 것인 양 가져가고 없었고 모든 연락처가 담긴 핸드폰과 카드의 실종은 패닉이 올 만큼 당황스러웠다.


한참 씨름을 하며 보안프로그램을 깔고 겨우 카드회사 홈페이지에서 카드를 정지시킨 뒤  싼 휴대폰을 개통해 내 폰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한참만에 웬 아가씨가 낭랑하게 받는다. 누가 주워서(옆에 앉아있는데 주워? 장난해?) 자기에게 줬다며 자기가 200불을 그 사람에게 주고 폰을 받았으니 폰을 찾고 싶으면 돈을 내란다. 알았다. 도서관 옆 길에서 만날 약속을 잡으니 한 시간을 기다리란다. 이미 거리는 어둑해지고 잠시 후 호리호리한 여자가 유모차를 끌고 팔 가득 문신을 한 민소매의 남자와 나타났다. 앞니가 깨진 채 비니를 쓰고 있는 그 남자는 영화 속 건달 같은 모습으로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래도 쫄지 않고 갑자기 250불을 내라는데 200불 밖에 없다고 버티자 자기가 은행에서 50불을 더 찾아서 주겠다며 자기한테 달란다. 그 사람에게 주고 내 폰을 받아오겠다나? 뭘 믿고 너한테 맡기냐? 내가 직접 가겠다니 술 취해 위험한 사람이라며 와이프와 아이, 그리고 자신의 벽돌폰을 나에게 맡기고 내 손 안의 200불을 나꿔챈 채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도착한 지 몇십 시간 만에 빠르게 머리를 헤집는 영어를 들으며 당장 노숙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사리분별이 잘 되지 않았다. 너네가 폰을 받았다며? 왜 다시 걔가 가져가? 멱살이라도 잡을 걸 그랬나?


여자에게 잃어버린 폰에 연락하러 폰을 샀고 가진 200불도 다 너희에게 줬고 숙소도 일자리도 없는데 이 짐을 두고 어떻게 하냐며 하소연을 했더니 말 끝마다 베이비를 연발하던 그녀는 이해한다며 자기 집에 재워주겠단다. 그새 돈만 뺏기고  왔다는 남자는 여자와 온갖 욕을 섞어가며 모르는 저 여자랑 어떻게 같이 자냐며 넌 차를 몰고 아기랑 같이 운전해 가고~ 라며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차가 어딨어?

-니 차 말고 니 엄마차!

-뭐래? 우리 엄마 지금 jail에 있다고.

응? 뭐? 내가 잘못 들었나? 교도소에 누가 있다고?

그러는 찰나, 길거리에서 웬 배낭 멘 사내가 남자와 아는 척을 하더니 남자가 그 사내에게 간략한 설명을 하고 자신들과 아이는 위험하니 그에게 날 데리고 가서 폰을 건네받으라 인계하고 떠나버렸다. 뜬금없이?



맹한 표정의 그 남자는 만나기로 했다던 장소에 몇 분 서 있지도 않더니 화장실을 가야겠다며 자리를 뜨고 어떻게든 누구 하나라도 잡아야 했던 나는 가방을 맡기고 가랬다가 결국 그와 함께 시내를 두어 바퀴쯤 돌았다. 이 식당은 화장실에 사람이 많고 여기는 화장실이 더럽고 하면서 말이다. 25kg 배낭을 메고 한참을 돌아 지쳤던 나는 더 이상 화장실 문 앞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나 때문에 눈치가 보여 화장실을 쓸 수 없다며 계속 말리기에) 식당 앞에 주저앉았다. 잠시뒤 주인에게 확인했더니 일행 아니었냐며  화장실에 남자는 없고 뒷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좌절했다. 배낭 멘 사내가 사라진 사이 내 폰에 전화했던 나는 방금까지 날 끌고 다닌 쌔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황급히 전화를 받아 끄는 걸 들었는데 말이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정말 노숙이라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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