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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하 Aug 10. 2020

끝까지 간다

  지난 화요일에 옆 부서 회식이 있었다. 내 부서 회식이 아니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오시기로 했다고 나보고 참석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회식 게스트로 불러주는 것도 참석하는 것도 좋아라 하지 않는데, 회식 초대인지 참석 압력인지 헷갈렸지만 사장님이 오신다는 말에 잠시 주저하다 ‘별일 없으면 갈게’라 답했다. 역시 사장이란 말 앞에서 작아지는 난 어쩔 수 없는 급여생활자인가 보다.  


  IMF 때 옮긴 이 직장에서 햇수로 20년째다. 술을 마시지 않지만 이유가 어찌 됐든 이따금 술자리에 불러주는 이가 있는 것이 고맙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술자리이기도 해서 두 달여 만에 술이 있는 저녁 회식에 참석했다. 술자리에 앉자마자 탄산음료를 하나 시켜놓고 건배도 하고 건배사도 하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 호응도 하고 맞장구도 치지만, 술을 마시지 않고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술자리에 있는다는 게 처음부터 쉬운 건 아니었다.

  맨 정신으로 버티는 나름의 노하우가 생겨난 것이다.


  술자리 <초반>에는 조심한다. - 술자리 초반은 “처음 세팅된 술병을 다 비우고 추가로 주문한 술병이 비워질 때까지”이다.

  술자리 초반에는 이런 사람이 꼭 있다. ‘오늘 같은 날은 한잔 정도 해도 되잖아, 딱 한잔만’ 이런 악마의 속삭임 같은 권유를 정중히 사양해야 한다. 술 마시면 온몸이 빨개지고, 눈은 토끼 눈이 되고, 몸속에서부터 괴로워지는데 어쩔 수 없다. 기분 안 나쁘게 미소로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받아만 놓으라는 달콤한 유혹도 뿌리쳐야 한다. 받아만 놓는 건 없다는 걸 이미 알기 때문이다. 받아 놓으면 한 모금만 마시라는 집요한 강요가 이어지기에 절대 잔을 받아서는 안 된다. 묵묵히 탄산음료를 입술을 적실 정도만 조금씩 마신다.  


  술자리 <중반>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 술자리 중반은 “처음 추가한 술을 다 먹고 두 번째 추가한 술부터 남은 술 한 잔씩 하고 가자는 말이 나오기까지”이다.

  술자리 초반에는 업무 관련이든 개인적인 이야기든 들을 만한 말이 있고 함께 대화가 가능하다. 한동안 술자리 중반에도 온 신경을 집중해 시끄러운 술자리의 잡음을 제거하고 상대가 하는 말을 경청해 대화하는 것이 매우 피곤하고 힘들어 집에 오면 파김치가 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술자리 중반에는 귀담아들을 만한 게 없다는 걸 알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눈을 마주치며 고개는 끄덕이지만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사실 들리지도 않는다. 설사 들린다 해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한말 또 하고 한말 또 하고, 이 말했다 갑자기 저 말하고 뭔 말인지 모르겠는 경우가 많다. 간혹 다음날 ‘내가 어제 한 말 생각해 봤어?’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이때 이렇게 말한다. ‘난 술자리에서 들은 말 술집에서 나오는 순간 싹 잊어버려, 그래야 사람들이 술 안 먹는 나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지 않겠어? 어제 뭐라 그랬는데?’ 지나고 보니 이 말의 효력은 대단했다. 지금 난 술자리에서 들은 말 어디 가서 전하지 않는 믿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


  술자리 <막판>에는 되도록 많이 크게 웃는다. - 술자리 막판은 "막잔 먹자며 술을 따르다 술 모자란다며 술을 추가해서 시킬 때부터 술자리가 정리될 때까지"이다.

  모두 술기운에 기분이 up 되어 있다. 하지만 이때가 가장 아슬아슬한 때이다. 누군가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분위기가 얼어버릴 수 있고 어떨 땐 큰소리가 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냥 웃는 게 필요하다. 웃음과 함께 그런 분위기 깨는 상황을 최대한 피해가야 한다. 특히나 이번 같은 회식자리에서는 술자리 막판에 사방에서 스피커가 터져 나와 사장의 일장 훈시가 좌중에 전파되는 것을 교란시키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최소한 내 자리 주위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위 사람에게 사장 말하니 조용하라는 일은 덤인 것이다.


  그래도 요즘은 술 문화가 많이 변해 술 안 먹는 사람에게 강권하는 일은 없다. 탄산음료로 건배를 해도, 탄산음료가 든 술잔을 들고 건배사를 해도 되니 참 세상 많이 변했다.

  술은 안 마셔도 안주는 먹으니 술자리에 많이 불러 달라는 오피셜 멘트와 함께 오늘 이 자리에 불러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고 꼭 한다.

  

  1차가 끝나면 호프집으로 2차를 간다, 나도 꼭 간다.

  난 2차를 가면 항상 얼음물을 마신다. 2차가 좋은 건 아무도 나한테 술 먹으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제 내가 술을 먹는지 안 먹는지 관심이 없다.

  2차 호프집에 가면 다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소주를 먹던 병맥주를 먹던 생맥주를 먹던 먹태와 과일안주시켜놓고 알어서 앞자리 옆자리에 앉은 사람하고 재밌게 먹는다. 2차부터는 중앙집권이 없다. 지방분권이다. 2차에서는 주문은 내가 해준다. ‘다 마셨네, 한잔 더?’, ‘안주 뭐 먹고 싶은데?’ 내 역할이 분명해지는 곳이 2차다.


  소주 딱 한잔만 더 하자 3차, 그래 나도 간다.

  2차가 파하면 택시 타고 집에 갈 사람, 버스, 지하철 타고 집에 갈 사람 가고 몇 명 남지 않는다. 내가 왜 집에 안 가고 있냐고? 대리 불러 줘야 되니까.

  한 테이블 정도 되는 3~4명이 남는다. 그들 마음은 똑같다. 대리 올 때까지 딱 한잔만 더 하자. 그래 딱 한잔 더하는 3차, 나도 간다.

  3차에서 대리를 부르는 순서가 있다. 3차쯤 되면 통역이 없으면 원활한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 한 명 정도 생긴다. 근데 이 사람 집이 가장 멀다. 이 사람부터 보내야 한다. 한 명 보내고 두 명 보내고 나면 ‘야 오늘 고생했다. 너도 가라’, ‘그래 너도 조심히 들어가’ 이렇게 오늘도 술 안 마시고 끝까지 갔다. 피곤하지만 오래간만에 재밌는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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