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술꾼은 술과의 거리가 절대적인 것이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누구 앞이라고 어느 여행지라고 어떤 안주라고 시시각각 술에 대한 자세가 달라지면 쓰겠는가?
그런 면에서 본인은 참 한결같다. 물론 장소에 따라 주종을 가리지도 않는다.
상황에 따를 수는 있겠다. 운전을 해야 하는 경우, 약국이나 병원이 없는 오지의 여행지일 경우, 등산을 하는 경우, 병원인 경우는 예외로 두자. 나 자신이나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허용을 뜻하다고나 할까?
머리가 아프면 두통이 사라질 때까지 마셔보자.
설사가 나면 위장 운동이 멈출 때까지 마셔보자.
감기가 걸리면 감기가 톡 떨어질 때까지 소주에 고춧가루 풀어서 마셔보자.
누가 이기나 해보자.
개인 사업자인 나는 특별한 회식이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는 어른이.
여러 명이 모이는 것보다 개별적인 만남을 선호하므로 2인 독서모임, 2인 생일파티, 2인 등산회 등을 개설하여 운영한다. 멤버는 나 이외에 단 1명만 뽑는다. 그게 편하다.
2인 정기 모임은 한 달에 2회 정도, 동창회나 학부모 모임은 1년에 4번 정도 하는데, 그런 모임들 이외에도 가족 모임이나 오랜만에 명절 고향을 찾은 친구 등 여러 개가 되다 보니 주 1회 정도는 식당이나 술집에서 술을 마시게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느냐? 30일 중에서 4일은 밖에서 나머지 26은 쉬어 가느냐? 무슨 말씀인가? 나머지는 집에서 마신다. 홈술, 혼술. 최애 취향이다. 물론 혼술을 집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고, 혼자 여행을 가거나 동네의 작은 선술집에서 마시기도 한다.
-혼술을 할 때 유의사항
쫄거나 주눅 들지 말 것, 당신은 죄인이 아니다.
주변시선 눈치 보지 말 것, 당신은 대한민국 헌법이 정한 명백한 성인이다. 당당히 마셔라.
국밥에 소주 한 병을 시켰다고 미안해하지 말라는 뜻. 주인은 더 좋아할 테니. 대한민국에서 젊은 여자가 혼자 국밥에 소주 마시는 일은 아직 꼴불견인 걸까? 거슬리는 걸까?
그건 누가 정한 규칙이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것. 그딴 구린 생각은 나부터 버리자. 처음에 본인도 혼술 레벨 0단계 홈술 단계에서 혼술 레벨 1단계 BAR 단계로 승급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처음 혼술을 마시러 BAR의 문을 두드리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두근두근. 그런데 막상 BAR에 앉아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다 보니 이것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니까. 다음단계는 식당에서 국밥에 소주 마시기인데 본인은 그 단계까지는 이르렀다. 4단계인 고깃집에서 혼술 하기는 뱃골이 작아 불가능. 이럴 땐 대식가가 되지 못한 것이 한이 맺힌다.
위선일지 모르겠지만 장소는 안 가리는 녀석이 계절을 탄다.
가을에 마시는 술이란?
세상이 차분해지는 한 개의 철. 봄과 여름이 들숨의 계절이라면 가을과 겨울은 날숨의 시절이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자연은 자신을 내려놓고, 한 해의 끝자락에서 다시 피어날 계절을 준비한다. 나무들이 잎을 떨구는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내려놓고 또 무엇을 채워가야 하는가?
혼자 술을 마시며 가을을 맞이하는 순간은, 어쩌면 인생에서 소소한 반추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술 한잔을 마시며, 지나간 과거들을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여백에 씨앗을 뿌리는 계절. 그 순간 술은 단순히 기분을 돋우는 도구가 아니라, 나 자신과의 깊은 대화를 나누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삶도 술처럼 일관되게 대해야 한다.
술 한 잔이 비워지고 나서야 마침내 채워지듯이, 술에 따라 잔이 다르고 잔에 따라 붓는 양이 다르듯이, 술과는 적당한 물리적 거리가 필요하듯이 말이다.
인생도 그런 것이다.
비우고 나서야 채울 수 있고, 각자의 그릇에 따라 담기는 삶의 여정이 제각각 일테지.
텅 빈 술잔이 채워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일과 휴식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