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겨울의 봄 07화

07. 주원과 명선

by 백수광부


명선의 장례가 끝난 후 주원은 지역아동센터에 들렀다. 그녀의 짐을 정리하는 주원에게 센터장이 편지를 건넸다.


“네 엄마가 전해주랬어.”

“혹시 선생님께서는 본인 죽음을 예상하신 건가요?”


“글쎄다. 사람은 언젠간 죽으니까.”


주원은 편지와 명선의 짐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고 센터를 나왔다. 상자에는 명선이 즐겨 읽던 책, 핸드크림, 아이들이 건넨 삐뚤삐뚤한 글씨로 쓴 손 편지 등이 들어있었다. 터벅터벅 걸어 나오다 잠시 쉬고 싶어 벤치에 앉았다.


“흐음.”

몸속 깊은 곳에서 막막한 한숨이 나왔다.

"샤라락."

바람에 흩날리는 잎사귀 소리가 들렸다.


아홉 살 주원은 엄마가 보고 싶은 날이면 미루나무 아래 벤치에서 글을 썼었다. 그리움의 편지가 바람을 타고 하늘에 닿을 거라 믿고 싶었다.


열여섯의 주원은 다시 그 미루나무 아래에 앉았다. 그리움인지 슬픔인지 원망인지 모를 누군가의 죽음을 감당해야 했다. 마음이 너덜거려 서 있기도 힘들었다.


'나는, 나란 사람은 함께 하면 상대를 불행하게 하는 사람인가?'


주원은 명선이 보낸 편지를 뜯어보았다.


To. 주원


네가 처음 센터에 온 날이 생각난다. 엄마를 잃고 아빠 손을 잡고 왔었지. 다문 입술이 어찌 그리 야무진지 어린아이 같지 않았어. 하지만 눈빛은 겁 많고 순수한, 영락없는 아이였지. 그 모습을 보며 네 엄마가 너를 두고 어찌 눈을 감으셨을지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어.


너는 선물이었을 거야.


아이들이 축구를 할 때도 너는 미루나무 아래에 앉아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지. 호기심 가득해야 할 나이에 슬픔을 한껏 머금고 있는 모습이 참 많이 안쓰러웠단다. 어린 가슴에 어쩌다 그리도 무거운 돌덩이가 박힌 건지, 언제쯤이면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안타깝기만 했단다. 울지 않고 슬픔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너의 글을 보면 더 마음이 아프고 아렸어. 너에게 엄마는 그리움을 넘어선 고통 같기도 했어.


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선생님일 뿐이었지. 너보다 더 어린 딸을 혼자 키우는 처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결혼에 실패한 경험도 있었는데 나는 또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나 봐. 네 아빠와 다시 시작하는 결혼생활은 행복하리라고 말이야. 너의 상처는 내가 잘 보듬어줄 수 있다고 말이야. 너의 엄마가 되어줄 수 있다고 말이야.

그것이 너를 더 힘들게 한 선택이었다는 걸 차마 그땐 몰랐어.


주원아, 날 용서해 줘.


이리 빨리 떠나게 될 줄은 몰랐어.

어린 너에게 또 다른 고통과 짐이 될 줄은 몰랐는데 미안해.

참 못난 엄마지.


그리고 염치없지만 부탁할 게 있어.


혜선 이모가 맡아주겠지만 그래도 지현이 부탁할게.

마음이 아픈 아이야.

살펴줬으면 해.


고마웠어. 아들.


주원은 장례식 내내 꾹꾹 참아왔던 눈물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문장 때문이었다.



주원은 센터 선생님이던 명선이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라 부르지 않았다. 선생님일 때는 의지했던 마음도 엄마가 된 이후에는 의지 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사춘기 반항심으로 명선을 힘들게 했다. 집안 공기가 냉랭한 날이면 밤마다 명선이 혼자 술을 마시며 운다는 것도 알았지만 모른 체했다. 웃으며 그녀를 엄마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 지지가 않았다.


두 번째 부인 명선도 병으로 죽고 난 후, 주원의 아버지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집을 나갔다. 돈을 벌어오겠다는 쪽지만 남기고 아무리 연락해도 연락이 닿질 않았다.


어린 지현은 명선의 언니, 혜선의 손에 맡겨졌다. 혜선은 주원까지 데려가 돌볼 수는 없는 처지였다. 남편도, 아들 태현의 눈치가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다시 지역아동센터로 보냈다.


“사실 너랑 나는 별 사이는 아니지만, 네 엄마 부탁도 있고.”

“···.”


혜선은 주원에게 이백 만원이 든 돈 봉투를 건넸다.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만 센터에서 지내. 그게 너도 편할 거야.”

“···.”


“졸업 후 연락 한번 하렴.”


혜선은 전화번호 하나를 남기고 주원과 헤어졌다.

주원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버려졌다는 생각에 젖어드는 것조차 무모하게 느껴질 정도로 삶은 그에게 가혹했다. 처절하게 혼자라는 멍한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오늘은 장사 좀 했소?"


혜선의 말에 진성은 지현이 손님 머리채를 잡고 빨간 장갑을 뺏었던 일을 말했다. 걱정도 되고 속도 상한 혜선이 지현을 찾아다녔다.


“지현아! 지현이 어딨냐?”


인기척이 없어 혜선은 절룩거리며 지현의 방으로 갔다. 방문을 열어보니 지현이 빨간색 아기 장갑을 품에 안고 있었다.


“너 이거 어디서 났냐?”


지현은 장롱 쪽을 가리켰다.


“거기는 열지 말라니까.”


지현이 장롱 높은 곳에 올려둔 명선의 유품 상자를 뒤져본 모양이었다.


혜선은 갑자기 울컥해져 지현의 방에서 나왔다. 안방으로 가서 문을 닫고 누웠다. 다리가 욱신거렸고 가슴도 욱신거렸다. 베개를 꺼내 자리에 누웠다. 뺨을 타고 눈물이 찔끔 흘러내렸다.


‘저것을 두고 그리 일찍 가면 어쩌냐.’


혜선은 그때가 떠올랐다. 명선이 이혼을 한 후 아장아장 걷는 지현을 데리고 집으로 찾아온 날.


“결국 이 어린것을 데려온 거야?”

“···.”


“아직 앞길이 창창한데 왜 애를 달고 오길 달고 와?”

“···.”


“으휴, 이 미련한 것아.”


방긋방긋 웃고 있는 지현을 보며 혜선은 차마 웃어줄 수가 없었다.


“언니, 직장 구하고 자리 잡을 때까지만 지현이 좀 부탁해.”


이혼한 명선은 언니 집에 딸 지현을 잠시 맡겼다. 지현이 끝없이 울어대는 날이면 빨간 아기 장갑을 지현에게 끼워주었다. 그러면 지현은 두 손을 가슴에 포개어 얹고는 잠이 들곤 했다.


빨간 장갑은 명선이 지현을 임신했을 때 직접 손으로 뜬 것이었다. 하나는 곧 태어날 지현이 것이고 또 한 켤레는 지현을 잉태하기 전에 유산한 아들을 생각하며 뜬 것이었다. 한참 싱그러울 열다섯 남자아이 손에 맞을 크기로 말이다.


'한 켤레는 어디 간 거지?'


혜선은 명선의 유품 상자를 뒤졌지만 그곳에 또 다른 장갑은 없었다.

keyword
이전 06화06. 서주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