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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겨울의 봄 08화

08. 겨울의 여름

by 백수광부


천천히 스며드는 사랑을 좋아합니다.


겨울은 주원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이후, 줄곧 쪽물에 빠져버린 무명천이 된 것 같았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자신을 물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짓누르는 느낌과 떠오르는 느낌이 동시에 스며들었다. 알 수 없는 기운을 느끼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문자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가희였다.

겨울은 가희가 보낸 인터뷰 녹음파일을 열었다.


음침하고 좁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 안을 그의 목소리가 휘감았다. 겨울은 베개를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그의 호흡을 따라가 보았다.


같은 베개를 베고 서로 마주 보며 누웠다. 그의 속눈썹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나의 숨소리가 신경 쓰였다. 그의 몰캉거리는 안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그에게 빨려들 것 같았다.


겨울은 주원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서 작가님, 잘 지내시ㄴ ...”

문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 끝내 보내지 못했다. 자꾸 망설이게 되었다.


그때, 가희에게 전화가 왔다.


“토요일에 서 작가 서울 온대.”

“아, 왜?”

“출판사에 볼일 있다나 봐.”

“네가 먼저 전화했어?”

“응.”

“왜?”

“아~ 인터뷰 할 때 사진을 못 찍어서 보내줄 수 있냐고.”

“그랬더니?”

“서울 오는 날 찍자던데?”

“아···.”

“써머 21에서 보기로 했어. 올 수 있지?”

“봐서.”


늘 거리낌 없이 자연스러운 가희였다. 자신감 넘치고 망설임 없는 그녀를 보면 겨울은 가끔 허탈했다. 자신은 오래 고민하는 것을 가희는 쉽게 실행해 버렸다. 문자를 썼다 지웠던 자신이 못나보였다.


주원이 서울에 온다는 그날은 겨울에게는 과외 알바 면접이 잡힌 날이었다. 가희에게는 미리 말하지 않았다. 닥친 후에 적당히 핑계를 대고 안 갈 생각이었다. 그 공간에서 비중 없는 엑스트라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 기분으로는 주원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토요일 오전, 주원은 미팅시간보다 조금 일찍 출판사 건물에 도착했다. 지하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했다. 소설책 3권과 문구류를 사서 1층 카페로 갔다. 커피를 마시며 젊은이들 가득한 대학로를 구경했다. 해사하게 웃는 그들을 보니 미울 정도로 부러웠다. 아무 걱정 없는 얼굴을 자신은 결국 갖지 못한 채 청춘의 시계는 빠르게 흐르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캐릭터가 떠올랐다.


이름은 '준우'.

펜을 꺼내 준우를 스케치했다.


준우는 밝았다.

준우는 씩씩했다.

준우는 사랑스러웠다.


준우 옆에는 그녀가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소설을 써 내려갔다. 웃고 있는 두 남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환해진 얼굴로 카페를 나와 출판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출판사와 미팅을 마치고 주원은 써머 21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누가 그를 불렀다.


“서 작가님!”


주원이 돌아보자 가희는 인사 대신 휴대폰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찰칵!"

“어! 준비도 안 했는데.”

“아주 잘 나왔어요. 작가스럽게.”


가희는 주원에게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주원도 흡족한 표정이었다.


“화내실 줄 알았어요.”


가희는 인터뷰할 때 예민했던 주원을 생각하며 긴장하긴 했었다. 하지만 주원의 반응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가 되물었다.


“제가 왜 화낼 거라 생각했어요?”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고도 그랬으면 가희 씨는 장난기가 다분하군요.”

“제가 좀 그렇죠? 별 의도는 없는데 말이죠.”


“이런 종류의 무례함은 괜찮습니다. 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럽네요.”


주원은 통통 튀는 가희의 행동이 신기했다. 또 그 행동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 자신의 반응도 신기했다. 그녀 특유의 발랄함이 뭔가 주원을 편하게 했다. 그녀의 말과 행동은 마음속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스르르 미끄럼 타듯 춤을 췄다.


“그럼 더 무례해도 될까요?”

“무슨?”


주원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가희를 바라보았다.


“21살 맞죠? 우리 말 놓을까?”

“풉.”


주원은 가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성격 참 시원시원하네요.”

“말 놓자니까.”


가희는 때마침 도착한 맥주잔을 들어 주원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그래.”


주원도 흔쾌히 말을 놓곤 건배했다. 둘은 술을 마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가희는 진지한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취미가 뭐야?”


가희의 말에 주원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크게 취미랄 건 없지만, 베이킹 좋아해.”

“오. 쿠키랑 빵 만들어?”


“다 가능하지. 케이크도 가능하고.”

“그럼 크리스마스 때 케이크 만들어서 카페에서 파티하자.”


“그러지 뭐.”


맥주병이 쌓이는 만큼 둘도 점점 친해졌다.


밤 9시 30분. 겨울이 써머 21에 도착했다.


“어, 겨울이 왔네.”


약간 발그레해진 가희가 겨울을 반겼다.


“전화 왜 안 받았어?”


겨울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면접이 잘 풀리지 않아 집으로 바로 갈 생각이었는데 가희가 전화를 받지 않아 결국 오게 되었다. 살짝 취해 기분 좋아 보이는 둘의 모습을 보니 겨울은 길 잃은 미운 오리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주원아, 겨울이랑 얘기하고 있어. 나 화장실 좀.”


겨울은 흠칫 놀랐다. 가희가 서 작가를 주원이라고 부르는 것도, 자신이 아닌 서 작가에게 자신을 부탁하는 것도.

가희가 화장실을 간 사이, 겨울은 주원과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맥주 한 잔 시킬까요?”

“아니요.”

“술 못 마셔요?”

“그건 아니지만, 오늘은 안 마시려고요.”


주원은 가희를 기다리는 듯 화장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 그의 모습에 겨울은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겨울은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과외 중개사이트 담당자가 자신에게 전해준 말.


"학생 어머니께서 '겨울 씨가 성실해 보이기는 한데, 뭔가 걱정이 많아 보이는 인상이라 우리 아이랑은 맞지 않을 것 같아요'라고 하셨어요."


'뭔가 걱정이 많아 보이는 인상.'


겨울은 과외생 어머니가 자신을 거절한 이유를 듣고 1차로 상처를 받았고, 그 말을 가감 없이 전한 중개담당자에게 2차로 상처를 받았다. 다 큰 어른이 아직은 어린 어른에게 준 상처가 제법 컸다. 그 상황에서 아무 말 못 한 자신이 바보 같아서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써머 21에 들어섰는데 가희가 해맑게 웃고 있어서 속상했다.


'생기 있는 얼굴이란 저런 건가?'


화장실 다녀온 가희가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겨울아, 우린 말 놓기로 했어. 너도 그렇게 해.”

“난 천천히 할게. 익숙해지면.”


주원도, 가희도 더는 강요하진 않았다. 셋이었지만 둘의 술잔만 줄곧 소리를 냈다.


주원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진정한 친구란 어떤 사이일까?”


그는 가희를 쳐다보았다. 가희는 찡끗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겨울이 용기 내어 말했다.


“힘들거나 슬플 때 곁에서 위로해 줄 수 있는 존재 아닐까요? 비밀도 믿고 말할 수 있는 사이?”

“그런 건가?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주원의 말에 겨울은 살짝 당황했다.


“나에 대해 알아도 모르는 척, 내 시간을 웃음으로 물들이는 사람. 그게 진정한 친구 아닐까?”


주원의 말에 가희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맞아. 나도 어쩌면 가볍고 편안한 친구 사이가 더 좋아. 본인 얘기 다 쏟아내며 모든 걸 공유하려는 사이는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


겨울은 가희의 말이 꼭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가희에게 울면서 털어놓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그녀 머릿속에서 지울 수만 있으면 그러고 싶은 순간이었다.


겨울은 반박하고 싶었다.


“그래도 친구라면 힘들 때 들어주고 위로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위로한다고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난 사실 혐오스러워.”


주원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 말을 했고 겨울은 깜짝 놀랐다. 가희가 분위기 수습을 위해 말을 꺼냈다.


“뭘 또 혐오까지. 너 취했어?”


순간 이성을 잃은 듯 주원은 강하게 말했다.


“어차피 인간은 자신이 겪어보기 전까지는 절대 타인의 감정의 끝을 알 수 없어.”

“···.”

“난 일상이 잿빛이야. 날 웃게 해 줄 사람이 필요해. 나에게 친구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

“먹물이 스며들까 봐 겁이 나는데.”

“···.”

“기어이 다가와 나의 상처를 다 아는 양, 나를 위로하고 슬픔의 세계로 젖어들게 하는 사람. 난 사실 그런 사람을 혐오해.”


주원의 말에 겨울과 가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술에 취한 듯 주원은 의자에 기대며 혼잣말을 했다.


“그래서 난 소설을 써야 해. 다 토해내야 해.”


주원에게 소설은 슬픔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허우적거림이었을까?

주원이 출입구 문밖으로 나가자 가희가 입을 열었다.


“서 작가 좀 흥분한 거 같지?”


겨울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나 화장실 좀.”


가희가 화장실이 있는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5분 후 다시 돌아왔다.


“이제 우리도 가자.”

“서 작가는?”

“먼저 갔어.”


겨울은 뭔가 그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미안함이 일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만 예민하게 구는 것 같은 모습에 서운함도 감추기 힘들었다.


“내가 뭐 실수라도 한 건가?”

“실수? 난 잘 모르겠는데.”

“흠.”

“작가들 원래 좀 예민하잖아. 우리 엄마도 그래.”


겨울은 괜히 주원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겨울은 어쩌면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의 어둠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비슷한 무언가에 끌렸다. 그래서 보듬고 싶었다.

'연민이었을까?'

'하지만 연민이 아닌 것 같아.'


분명 밖은 겨울인데. 겨울은 여름 태양에 데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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