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상처
아침해가 슬픔을 거둬들였다.
겨울이 눈을 떴다. 아무도 없었다. 뒤를 돌았지만 거기도 그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둘러본 어디에도 쪽지 같은 것도 없었다. 잠시 실망했지만 그보다 걱정이 앞섰다.
'집에 잘 갔겠지?'
'많이 힘들 텐데......'
...
...
'이 남자, 자꾸 생각난다.'
멍하니 누워있다 불현듯 떠올랐다.
'앗!'
얼굴을 씻고 학교 갈 채비를 했다.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었다. 급하게 준비를 마치고 문을 열었을 때 무언가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샌드위치와 우유였다. 쪽지도 있었다.
고마웠어요.
시험 잘 봐요.
주원이 놓고 간 것이라 생각하니 겨울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시험인 건 어떻게 알았지?'
샌드위치와 우유를 미니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급하게 먹어버리면 아까울 것 같았다. 알바가 없는 날이라 저녁으로 천천히 먹고 싶다 생각했다.
'이걸 봤나? 훗.'
냉장고 위에 놓인 탁상 달력에 형광펜으로 굵게 표시되어 있었다. 12월 24일에 '기말고사 쫑'이라고 말이다.
'제법 센스 있어.'
겨울은 설레는 발걸음으로 후미진 골목을 지나 학교 가는 버스에 올랐다.
“이제 우린 자유다!”
가희가 기말고사 끝을 알렸다.
“시험이 끝난 건 좋은데 당분간 너 못 보는 건 슬프다.”
가희는 미국 어학연수를 이유로 휴학계를 냈다. 가희를 당분간 못 본다는 게 겨울은 많이 섭섭했다.
“나도. 너 못 만나면 무슨 낙으로 살지?"
"얼마 정도 있는 거야?"
"글쎄, 즉흥적인 안 여사님 계획 하에 움직이는 거라."
"엄마랑 같이 가는 거야?"
"엄마 작품 구상하러 가는 길에 내가 따라가는 거야."
"언제 가는데?"
"1월 중순쯤?"
"그래? 중간에 자주 보자."
"그래. 우리 놀러 갈까?"
우연의 제안에 가희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디? 나 오늘 알바 없어. 놀러 가자!”
겨울도 오늘만은 홀가분하게 놀고 싶었다. 1월부터 방학 집중 알바가 시작되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희는 어딘가에 전화했다.
“주원, 뭐 해?”
겨울은 가희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젯밤에 주원을 만났다는 얘기를 하지도 못했는데,
술 취한 그를 자신의 자취방에 재웠다는 말은 더더욱 못 하겠는데,
주원이 아버지 장례를 마친 직후라고 말하지 못했는데.
가희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 불안했다.
“서 작가님! 덕분에 리포트 점수는 A+ 받았습니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데?”
“크리스마스 케이크 안 만들어놨어?”
“그럼 케이크는 됐고 사발면은 줄 수 있지?”
“아 뭐야? 써머 21에서 약속했잖아. 파티하자고.”
“우리 오늘 시험 끝났단 말이야. 제발. 어?”
“오케이. 그럼 지금 출발할게.”
전화를 끊은 가희의 얼굴은 잔뜩 신나 있었다.
“들었지? 우리 오늘 주원이 보러 가자.”
겨울은 가희에게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예의, 배려, 공감'에 대해서 그동안 참아왔던 참 교육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말부터 튀어나왔다.
“너 서 작가랑 계속 연락했었어?”
“아니, 왜?”
“아···. 매일 연락하는 사이처럼 자연스러워서.”
“그런가? 크게 격식 차릴 필요 있나? 친구끼리.”
겨울은 가희가 그럴 때마다 할 말이 없었다. 가끔은 부럽긴 했지만 지금 서 작가를 보러 갈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가희 혼자 보낼 용기는 더 없었다. 결국 겨울은 가희가 이끄는 대로 주원네 매점행 버스에 올랐다. 뒤집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말이다.
겨울은 창밖에 펼쳐지는 겨울 바다 풍경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에 이는 잔잔한 파도가 평화롭다 느꼈다. 창문에 머리를 박으며 꾸벅꾸벅 조는 가희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우~ 진짜 저 녀석은 엉뚱해. 근데 하는 짓이 귀여워.'
겨울은 자신이 바라보는 바다와 주원이 묘사한 소설 속 바다를 오버랩하며 포근한 시간 속을 달리고 있었다. 도착지에 가까워질수록 두근거리는 심장만 빼고 모든 게 평온했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매점으로 향했다.
“너무 배고프다. 그치?”
“응. 많이.”
매점에 도착한 가희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우리의 은인!! 서 작가님!!”
서 작가는 씩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겨울은 안심했다. 얼굴이 어두우면 어쩌나, 자신을 보고 어색해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우리 사발면 좀.”
가희는 바로 주문했다.
“어. 알겠어.”
주원이 사발면 세 개를 가져와 각자 앞에 놓았다.
“나도 아직 못 먹어서.”
가희는 나무젓가락을 뜯어먹기 시작했고 겨울은 잠시 기다렸다. 그 모습에 주원이 겨울에게 물었다.
“혹시 참깨면 안 좋아해?”
“아니. 좋아해.”
겨울이 용기 내어 주원에게 말을 놓았다.
“남아있는 사발면이 참깨면과 열라면 밖에 없어서.”
가희가 무척 궁금한 듯 주원에게 물었다.
“근데 왜 참깨면으로만 준비했어?”
“그냥. 고소하잖아.”
“푸하핫~ 너 그거 웃기라고 한 얘기야?”
가희가 웃자 주원도, 겨울도 함께 웃었다. 겨울은 주원이 어젯밤과 달리 웃고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배불리 한 그릇을 다 먹은 가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집어 들었다.
“이거 뭐야? 지금 쓰는 소설?”
“보지 마!”
주원은 빛의 속도로 달려가 가희 손에 있던 수첩을 낚아챘다.
“조금만 보면 안 돼?”
“자신 없어.”
주원의 만류에도 가희는 소설에 대한 호기심을 거두질 않았다. 겨울도 주원이 쓴다는 소설이 궁금했다.
“얼핏 보기에 사랑, 키스 그런 말들이 써져 있던데 장르가 로맨스야?”
“응. 근데 잘 안 써져. 경험의 부재. 한계가 느껴져.”
주원이 쑥스러워하자 가희는 말했다.
“한계는 극복해야지. 이번 기회에 연애 한 번 해보는 건 어때?”
주원은 가희의 농담 섞인 제안에 살짝 웃어 보이고는 계산대로 돌아갔다.
“그러지 말고 보여줘 봐.”
“인터뷰 덕분에 우리도 큰 도움 받았는데 이번엔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어. 여자들 심리는 여자가 제일 잘 아니까.”
겨울도 소설 내용이 궁금해 함께 졸라댔다.
그때 가희가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예 우리 릴레이 소설 한 번 써볼까?”
“릴레이 소설?”
주원이 호기심을 가지며 가희를 쳐다보았다.
“응. 네 소설에 이어서 우리가 써보는 거지. 너는 여자의 심리를 알 수 있고 우리는 소설가의 작법을 배우고.”
가희의 말에 겨울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셋은 그렇게 릴레이 소설을 시작했다. 호기심 가득한 세 명의 작가가 그려내는 이야기가 어떨지 셋은 서로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몽글몽글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겨울은 가희의 제안을 곰곰 생각하다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셋이 돌아가며 쓰는 것보다 따로 써보는 건 어때?”
“어떻게?”
“서주원과 이겨울, 서주원과 정가희. 이렇게.”
가희는 겨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거 괜찮겠다.”
“그치?”
“오, 뭐야? 서주원 양다리야?”
주원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 순수한 모습이 겨울은 좋았다. 겨울의 얼굴도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졌다.
“야! 니들!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가희가 둘을 놀리자 주원은 웃으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겨울은 갑자기 그가 떠올랐다. 뒷모습을 보이며 훈련소로 들어갔던 그 남자.
겨울의 첫사랑.
원준 오빠.
동아리 선후배 사이였던 셋은 자주 어울렸다. 대학교 새내기였던 겨울과 가희 모두 1년 선배였던 원준과 말이 잘 통했다. 둘은 원준이랑 있으면 심심하지 않았다. 가희는 원준을 남자로 보진 않았다. 겨울에게도 그는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저 함께 얘기하면 편해서 좋다고 했다. 그 말에 겨울은 안심했고 가희는 둘이 잘 되길 도와주려 했다.
겨울이 더는 원준에게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가희에게 말한 날, 가희는 원준에게 바다에 가자고 졸랐다.
“원래 젊음의 역사는 낭만적인 바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가요! 바다!”
원준을 데리고 그렇게 셋은 바다로 갔다.
셋은 모래사장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며 재미있는 얘기를 끝없이 했다.
“동아리 K선배 있죠? A랑 사귀는 거 알아요? 대박이죠? 나 밤에 둘이 손잡고 다니는 것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그래? 동아리 모임 때는 둘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남녀관계는 정말 모른다니까.”
가희의 펌프질에도 원준은 아무 낌새를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 겨울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겨울이 입을 열었다.
“가희야, 나 화장실 좀.”
“거기 제법 으슥한 곳인데, 혼자 가기 무섭지 않아?”
가희가 말했다.
“괜찮아.”
겨울은 그렇게 말해도 착한 원준이 함께 가줄 줄 알았다.
“올 때 편의점에서 맥주 좀.”
"얼른 다녀올게."
"천천히 다녀와."
원준이 겨울에게 말했다.
둘을 모래사장에 남겨두고 겨울은 해수욕장 공중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고 나서 거울을 보았다. 바닷바람에 건조해진 입술에 립밤을 바르고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도 매만졌다. 그러곤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오빠가 좋아하는 맥주는 카스, 가희가 좋아하는 건 초콜릿. 그리고 난 뭐 먹지?’
캔맥주 6캔과 안줏거리를 사서 편의점 문을 나섰다. 모래사장으로 내려가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멈췄다. 그리고 편의점 뒤편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멀리서 보아도 하나의 정삼각형 실루엣이었다. 심장이 뛰었다. 무너졌다.
잠시 그대로 있었다. 용기를 내어 다시 그곳을 쳐다보았다. 가희의 목덜미를 감싸 쥔 것은 원준이었다.
“우두두두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그대로 비를 맞고 서있었다. 불투명한 흰색 봉지가 맥주캔에 달라붙었다. 울음밖에 나지 않았다.
휴대폰 벨이 울렸다. 가희였다. 받지 않았다.
다시 벨이 울렸다. 원준이었다. 받지 않았다.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그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가희는 술 마실 때 벗어두었던 야구 모자를 쓴 채 돗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원준은 다 마신 맥주캔을 정리하고 있었다. 겨울은 그 둘 어느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비가 많이 오네. 얼른 가자.”
겨울의 말에 둘도 서둘러 그 자리를 정리했다.
‘넌, 뭐가 그리 쉬워?’
2개월 후, 동아리 모임에서 다시 원준을 만났다. 곧 군대를 간다고 했다. 그곳에 가희는 없었다.
“오빠, 잘 다녀와요.”
겨울은 고백하진 못했지만 그에게 좋은 후배로 남고 싶었다.
알 수 없었지만 가희가 릴레이소설을 제안했을 때 겨울은 원준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