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안 어려워. 알려 줘?"
"응. 해보고 싶어."
"일단 갈아둔 원두가 있으니까 이걸로 하면 되겠다."
"원두를 바스켓에 담아서 머신에 끼우면 돼."
주원은 시범을 보였다. 가희도 그대로 따라 하려 했다.
"어, 잘 안 끼워지는데?"
겨울도 호기심이 생겨 그들이 있는 오픈 주방으로 걸어갔다.
"미안, 잠깐 손 잡을게."
주원은 가희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의 손등을 감싸 쥐곤 포타필터를 커피머신에 끼웠다.
"아, 이렇게?"
"어 맞아."
겨울은 애써 태연하려 했다.
'친절하구나.'
가희는 주원이 알려준 방법으로 커피를 내리는 데 성공했다. 어린아이가 줄넘기에 처음 성공한 듯 신난 표정이었다. 내린 커피를 쟁반에 담아 천천히 홀 쪽으로 나왔다. 그때 주원이 말했다.
"가희야, 한 잔은 왼쪽 끝 테이블, 다른 한 잔은 오른쪽 끝 테이블에 놔줘."
가희는 그의 말에 따라 흰색 바탕에 빨간 점무늬 머그잔은 왼쪽 창가에, 빨간 바탕에 흰색 점무늬 머그잔은 오른쪽 창가에 조심스레 놓았다.
“근데 왜?”
가희의 물음에 주원은 종이와 펜을 가져와 둘에게 나눠주며 말했다.
“지금부터 시작이야.”
겨울과 가희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주원을 쳐다보았다.
“내가 너희 둘에게 휴대폰 메시지로 내용 보낼게. 그 내용에 맞춰 너희가 뒷얘기를 쓰면 돼. 어때?”
“우와. 벌써? 콩닥거려.”
가희는 눈을 크게 뜨며 기대 가득한 얼굴로 겨울을 바라봤다.
“연애편지 쓰는 기분이야.”
둘에게 다가온 주원은 곱게 접힌 쪽지 두 개를 내밀었다.
“각자 하나씩 뽑는 거야.”
“뭘 정하는 건데?”
“캐릭터의 운명?”
“우와! 이거 너무 짜릿한데?”
셋은 신나는 글쓰기 게임에 빠져들었다. 겨울이 말했다.
“가희야, 쪽지는 내가 먼저 뽑을게.”
“그래. 우리 겨울이 아주 적극적인데?”
겨울은 쪽지를 먼저 뽑았고 가희는 남은 쪽지를 가지고 갔다.
“함께 펼쳐보는 거야.”
둘은 조심스레 쪽지를 펴보았다. 거기엔 그리 적혀있었다.
“소미.”
“해리.”
겨울은 ‘소미’를, 가희는 ‘해리’를 뽑았다. 주원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었다.
“소미는 왼쪽 창가 끝으로 가고 해리는 오른쪽 창가 끝으로 가서 앉아.”
그녀들은 주원의 말에 종이와 펜을 챙겨 자리를 옮겼다. 둘은 멀리서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리곤 창밖의 일몰을 감상했다. 문자가 울리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겨울은 엎드린 채 눈을 감았다.
소미? 예쁜 유리상자 같아.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운 여자일 거야.
가희는 한 손으로 턱을 받쳤다.
해리? 비밀 판도라 상자 같아.
자유롭고 신비로운 여자일 거야.
둘은 머릿속에서 소설 속 여주인공을 그리며 행복해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둘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겨울이 먼저 문자를 확인했다.
무기력하기만 한 집에서 자랐다. 희망을 꿈꿀 필요가 없었다.
그런 내게 그녀는 한 줄기 빛이었다. 귀한 희망의 빛이었다.
‘오늘도 볼 수 있을까?’
그녀의 자전거는 오후 4시쯤 우리 집 앞을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 3시 30분부터 창가 앞 책상에 앉았다. 철 지난 소설책을 뒤적이다 한 장도 읽지 못하고 목을 주욱 빼서 먼 곳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자전거가 멀찌감치 마을 어귀에 보이면 나는 미소를 누를 수가 없다.
책상 의자에 앉아 무심한 척을 했다. 자전거 바퀴소리가 점점 크게 나면 서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옆모습부터 뒷모습까지 눈에 담았다.
긴 생머리에 새하얀 피부.
달라붙지 않는 흰 리넨 원피스.
앞바구니에 실린 메밀꽃, 시집, 텀블러.
그녀를 본 날에는 꿈에서 그녀를 만났다.
아침에 눈뜨면 샤라락 사라지는 꿈이지만, 분명 낭만적인 느낌이었다. 새하얀 메밀꽃이 바람에 일렁이는 느낌이 잔잔히 가슴에 남았다.
그녀는 우리 마을로 이사 온 스무 살의 ‘소미’였다.
겨울은 소미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화자도, 서 작가의 시선도 마음에 들었다.
밤 근무를 마치고 새벽에 집에 들어왔다. 해리가 자고 있었다. 니코틴과 알코올이 뒤범벅된 찌든 냄새가 원룸에 가득 차 있었다. 해리는 몸에 꽉 조이는 옷을 벗지도 않고 잠들어 있었다. 오늘도 클럽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그녀 어깨에 손을 얹고 살짝 흔들어보았다. 미동이 없었다.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나의 혼잣말에 해리는 어떤 대답도 없었다. 그런 그녀를 애처로이 바라보았다. 그녀 몸을 조이는 재킷을 벗겼다.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로 옮겼다. 이불을 덮어주었다. 인기척을 느낀 해리가 내 손을 잡았다.
“준우야.”
해리가 불렀다. 준우를 불렀다.
“왜?”
그녀가 찾는 준우가 내가 아님을 안다.
그래도 내가 대답할 수밖에 없다.
준우는 여기 없으니까.
해리는 몸을 반쯤 일으켜 나에게 안겼다.
해리는 준우를 안았지만 나는 그녀를 안았다.
거부할 수 없었다.
껍데기라도 좋았다.
가희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소름 같은 전율을 느끼며 자신 앞에 놓인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둘은 제법 긴장했다.
펜 끝에 누군가의 인생을 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