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일조량이 부족하다.
겨울은 태양이 비추는 시간과 면적만큼 밝고 따뜻해졌는데 겨울에게 겨울은 그게 가장 아쉬웠다. 낮 시간 동안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니 빛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해 기분이 자꾸만 축축 처졌다. 우울감을 펼쳐 말려야 캄캄한 밤까지 쓸 에너지를 비축하는데 말이다.
'내 이름은 왜 겨울일까?'
사람 운명이 이름 따라간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겨울은 자신의 이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새하얀 눈꽃이 피는 설경은 아름답지만
춥고 외로운 계절, 겨울.
겨울은 시외버스터미널 뒤편 으슥한 곳에 살았다. 뜨내기손님이 하룻밤을 묵고 가는 여관에 월세를 내며 지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도망치듯 독립해서 본가를 나왔다. 도망치듯 나온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녀를 쫓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없었다. 겨울의 엄마는 성인이 된 딸에게 딱히 연락하지 않았다. 겨울도 굳이 엄마를 찾을 일은 없었다.
자취방이 있는 곳은 사계절 내내 곰팡이 냄새와 담배 찌든 내가 났다. 뜨내기들에게 그곳은 잠시 스쳐가는 곳이지만, 겨울에게는 매일 아침을 맞는 곳이라 눅눅한 게 싫었다.
음침한 골목을 지나 집으로 들어갈 때면 겨울은 생각했다.
'나는 겨울이야. 새하얀 눈처럼 고귀한 겨울이야.'
어떤 흙탕물도 튀지 않은 눈을 상상하며 겨울은 그렇게 되뇌었다.
학교에 가면 누구보다 빛나는 가희가 있었다. 티 없이 명랑한 가희랑 함께 있으면 겨울은 그저 좋았다.
'왜 질투는 생기지 않는 거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밝고 명랑하며 별 계산 없는 그녀에게는 질투가 생기진 않았다. 그저 그녀와 있으면 우울하지 않아 좋았다.
가희 집이 풍족하다는 것.
가희는 어릴 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는 것.
가희는 돈에 구애받지 않고 문화생활을 즐기며 살아왔다는 것.
어차피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겨울은 가희가 누려왔던 것에 대해 부러워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주원이 나타난 이후로는 가희가 가진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생기 넘치는 환한 얼굴.
솔직하고 거침없는 말과 행동.
쉽게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명랑한 성격.
여느 날처럼 겨울은 무거운 몸을 버스 창문에 기대어 차창 밖을 보았다. 거리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낙엽이 휘이 휘이 날리고 있었고 연인들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주원의 얼굴이 스쳤다. 그의 얼굴, 그의 말, 그의 뒷모습, 그의 소설 등이 생각나 잠시 멍해졌다.
버스는 종점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겨울은 가방을 둘러메고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 내 작은 편의점으로 향했다.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살 생각이었다.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는데 한 중년의 여자를 봤다. 술에 취해 한 남자에게 반쯤 기댄 그녀를 보니 엄마가 떠올랐다.
중년의 남녀는 뭐가 그리 힘들고 외로운지 끈적끈적한 눈빛을 나누며 서로의 몸을 쓸어 만졌다. 술에 취해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사는 게 힘들다고 했다.
겨울의 엄마도 남편과 이혼한 후, 남자들과 술을 마시며 저 말을 하곤 했었다.
'사는 게 힘들다. 정말 외롭다.'
겨울의 눈에 비친 엄마는 이상했다. 힘들다면서 웃음을 흘리셨고 살기 싫다면서 남자 품에 폭 안겨있었다. 어린 겨울은 도저히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있는데도 엄마는 외롭구나.'
어른들은 아이가 옆에 있어도 외로울 수 있는 건가 생각했다. 도저히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 엄마가 미웠다.
중년의 남녀는 겨울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은 채 손을 잡고 여관이 즐비한 쪽으로 향했다.
‘나는 아무리 외로워도 저렇게 살진 않을 거야.’
겨울은 편의점으로 들어가 라면 2개와 달걀 2개, 생수 하나를 사서 나왔다. 막차가 빠져나가는 터미널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서 작가였다.
'나한테 무슨 일이지?'
겨울은 잠시 망설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더니 옆 자리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거기엔 술 취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의 주머니에서 계속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
겨울은 통화 종료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그의 주머니 속도 조용해졌다. 가까이 다가가 그 남자를 살펴보았다.
“작가님!!!”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겨울은 그에게서 술냄새가 진동하는 걸 알아채고 그를 흔들었다. 이미 만취상태였다. 아무리 흔들어도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어떤 힘도 주지 않은 상태였다. 흐물흐물거렸다. 이런 추운 겨울날 그를 벤치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야 했다.
“저기 아저씨. 정말 죄송한데요.”
겨울은 안면이 있던 터미널 매점 관리인에게 부탁해 그를 자신의 자취방으로 옮겼다. 아저씨는 음흉한 눈빛을 남기고 사라졌다.
겨울은 그를 한쪽에 뉘었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관찰했다. 일주일 전, 써머 21에서 봤을 때보다 야윈 모습이었다.
좁은 방 한편에 쓰러져있는 그에게서 나는 알코올 냄새가 온방 가득 퍼졌다. 겨울마저 취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원의 등 뒤로 가서 누웠다. 그의 등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모든 게 나 때문이야.”
주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겨울은 온몸이 굳었다. 아무런 말 없이 기다렸다.
감각을 곤두세워서인지 알코올 냄새와 함께 나는 냄새를 알 것 같았다. 향 냄새였다. 상실의 향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주원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겨울은 계속 듣기만 했다.
“이제 정말 아무도 없어.”
겨울은 주원이 가여웠다. 그에게 한 뼘 더 가까이 다가갔다. 주원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버지마저도."
겨울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등에 손을 갖다 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당하지 못할 때는 기대도 돼요.”
“···.”
“위로가 되고 싶어요.”
겨울은 쓸쓸한 주원의 등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자신에게 온기가 있다면 전해질 거라 믿었다. 좁은 방에 지독한 알코올향과 은은한 향내가 진동했다. 겨울은 추측할 뿐이었다.
‘당신에게 오늘은 그런 날이군요. 도망칠 힘도 없는 그런 날.’
주원은 취기와 온기에 취해 겨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