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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서원 Sep 02. 2024

위대한 유산_어머님의 어록

지치고 힘들 때 나를 살린 그 한 마디

나에게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새록새록 생각나는 어록이 있습니다. 돌아보면 낱낱이 감사했던 그 한마디 말씀이 나의 '인생레시피'가 되었습니다 되었습니다.

   

"남의 복 불버마라!" 뜬금없다 싶게 '' 들어라고 시어머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경상도 사투리를 직역하자면 '남의 복 부러워하지 말아라' 그런 말입니다. 나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 축에 속합니다. 말이라는 건 설득력이 있어야 뜻이 관철되는 것임에도 말로 전달하는 것에는 젬병이어서 가끔 의도치 않게 오해도 받습니다. 힘들어도 참고, 울고 싶어도 참고, 화가 나도 참지요. 그땐 참 요령도 없이 생 속으로 받아내던 시절이어서 생채기가 되어 남아있습니다. 지원군도 없고 응원군도 없었던 그때 나를 자칭 '행주치마 전사'라 부릅니다.




가업이라는 부담감과 해내야 하는 분량의 일들로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갔고, 얄짤없이 매일 그 시간이면 아침해가 떴습니다. "아! 일주일만 병원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자면 안 될까?"를 갈구해 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이 나를 조련하던 그 시간, 삶의 현장으로 등 떠밀려 갔던 냉정했던 그 시절을 나는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티 없이 묵묵하게 마치 좋아하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돌잡이와 초등 저학년의 어린아이들이 셋이나 있었고 직원들과 양가 부모님, 그 외 저변에 챙겨야 할 식솔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처음엔  뭘 몰라서 그저 해야 하는 일이구나 싶었고, 시간이 가면서 체력의 한계로 지쳐갔습니다. 나는 왜 식당을 물려받았을까 하는 회의도 왔습니다. 가업을 잇는데 들이는 정성을 아이들을 케어하는 쪽으로 가져가고 싶은데 웬걸, 언감생심! 아이들은 교육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육아에 대한 로망이 산산조각이 나는걸 속 끓이며 감내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가업을 이어가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며, 최선을 다하면 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악조건에 더욱 강해지는 강점을 가진 사람이라 잘 이겨낼 줄로 알았습니다. 배고픈 사람 밥 먹이는 일도 좋은 일로 간주되는 종교적 의미도 희미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명절을 앞두고 어머님과 시댁 마루에 앉아 각마당을 응시하고 있던 중에 어머님이 그러시더군요. "남의 복 불버마라."  




어머님은 평소에도 말씀이 많은 분은 아니셨습니다. 아버님과 서로 소통이 안되었던 것은 각자 따로 주장이 있으셨던 거였고 내가 아는 어머님은 한 주제로 이리저리 가지치기하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님 말씀은 실용이셨고 아버님 말씀은 논리셨습니다. 그래서 각자 원하는 쟁점을 못 찾고 서로 손해 보신 거였습니다. 두 분이 서로 '갑론을박'하신 과거사들이 지금은 자식들의 추억을 더듬는 소재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증명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에게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시어머님은  가게 사정을 훤히 아시는 분이라 나의 고충을 꿰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만하면 잘한다고 쓰담쓰담해 주고 싶은데 고부간이 어디 그런가요? 어머님과 나는 40년이란 세월의 갭이 있습니다.  어머님은 나의 달란트는 물론이고, 여자로서 나를 가장 잘 알고 계셨고 응원하고 계셨다고 봐집니다.




가업을 이어간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식이 수반됩니다. 그 의식을 치른 사람은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책임감을 갖게 되며 초심에 의해 전력질주하게 됩니다. 어머님은 식대를 받으면 거슬러 주고 할 수 있는 깔끔한 앞치마를 새것으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엔 카운터가 없고 주인장이 전대를 차고 직접 식대를 받고 거슬러주는 형식이었다). 작은 의식 하나 가 얼을 이어가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어떻게든 선대의 누가 되지 않으려고 애썼던 세월입니다.


사람들(단골들)은 대쪽 같은 아버님을 더 기억하지만 실제로는 창업주이신 어머님이 더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님은 누구에게나 환대받는 인품 너부대대한 거목이셨고 아버님은 가게의 상징적 인물이셨습니다. 아버님의 대쪽은 영업의 흐름에 종종 태클을 거셨으니 어머님은 그런 문제들을 힘 안 들이고 푸는 전문 경영자셨습니다. 아버님의 냉정온도와 어머님의 온정온도가 적절히 편재하는 식당 분위기는 우리 가게만의 활력이었습니다. 메인 주방장이 있었지만 모든 레시피는 어머니가 관장했으며 그것만이 탁월했고 남과 차별화된 우리 가게만의 독보적 퀄리티였습니다. 어머님이 나에게 주신 어록 중에 소금 예찬도 인생 레시피 중의 하나입니다.


 "뉘솜씨 솜씨해도 소금 솜씨가 젤이다." (음식의 간 맞춤 하는데 자신감을 가져라어머님이 내게 주신 핵심 레시피다) 어머님은 소금을 쓰는 지혜를 이렇게 쉽고 빠르게  알아듣게 전수해 주셨습니다. 음식의 맛을 도우는 여러 가지 양념 중에 참기름도 아닌, 마늘도 아닌, 설탕도 아닌 소금의 쓰임을 이렇게 단번에 정리해 주셨습니다. 찌개를 끓여내는 데 있어서도, 음식의 간에 있어서도 진정한 한수는 '간'을 잡는 것이다는 것을 이렇게 명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요즘은 어느 식당엘가나 음식이 싱거워서 손이 안 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온 국민이 약속이라도 한 듯 건강상의 이유를 갖다 대며 싱거운 음식은 용서해도 짠 음식은 클레임을 걸고는 합니다. 싱거우면 프리패스~, 음식에 대한 개성이라고는 없어졌습니다. 마음대로 해서 내놓기에 좋으니 주방장의 실력도 평가절하되는 것 같습니다. 음식이란 싱거울 땐 싱거워야 하고 짤 때는 짜야 제맛인데 그 기준이 허물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아집니다.


K푸드 경영해 보았고 주방장이 되어 만들어도 보았습니다만, 우리 음식, 이대로 괞찮은지 오지랖으로 걱정합니다. 지금은 가업을 접고 봉급생활자로 조리사일을 하고 있지만 음식의 간을 맞출 때면 항상 어머님의 어록이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식의 간을 맞춰내어 놓음으로 나의 전문성을 확인받습니다.


남의 복 불버마라! 나를 살린 이 한마디는 서른 후반의 내 삶을 관통해 들어왔고 지금도 쉽게 흔들리는 여심을 꽉 잡아줍니다. 머님의 위대한 유산을 방패 삼아 나의 길을 단단하게 가고 있음을 이렇게 긴 보고서로 올립니다. 


어머니! 인생 레시피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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