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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 Oct 04. 2024

06. 싶었다.

시즌1.

열두 번째 이사를 마치고 겨울이 됐다. 



여전히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머릿속만 혼자 치열했다. 함박눈 대신 싸라기눈이 내리던 날 밤 눈을 맞으며 교회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맨 뒷자리에 앉아 달음질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다시 말하지만 작가가 되기로 한 건 말 그대로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지 기적 같은 변화가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단순히 마음을 먹는 것 만으로 또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간절히 바라던 일들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 모두 안다. 


산다는 건 한 편의 CF 같은 찰나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아닌 줄 알면서도 언감생심 바라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인 게 웃프다. 막상 글을 쓰기로 하자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아득한 날이 계속 됐다. 나름 정보를 찾는 답시고 좋아하는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보고 귀동냥으로 들은 말을 되새기며 내 나이만큼 낡은 책을 뒤적거렸다. 다독다작이 무슨 주문처럼 된 세계에서 무식을 무기 삼아 닥치는 대로 읽고 쓰기로 마음먹기도 했다. 누구는 매일 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또 누구는 가리지 말고 보라고 말했다. 일단 따라 쓰라고 하는 말도 많았고 결국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까지 했다. 온갖 말이 들려오자 나는 따라 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씩 내게 맞는 것을 고르기 시작했다.




네가 뭐라고 가리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내게 알맞은 건 따로 있고 그건 나만 찾을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다. 이왕이면 보다 옳은 쪽으로. 조금 돌아가더라도 방향을 명확하게 짚고 쓰고 싶었다. 또 글을 쓰기로 한 건 맞지만 그래서 결국 무엇이 되고 싶은 지를 정하고 싶었다. 그땐 그게 순서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무엇이 되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직업이 꼭 꿈과 같은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머릿속에 작은 핀조명이 떨어지고 무릎을 감싸 앉은 채 웅크리고 앉은 내가 보였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뭐가 되고 싶니. 


순간 파노라마처럼 몇 장면이 스쳤다. 


지난날 텔레비전 앞에 앉아 깔깔대며 웃고 울던 내 모습도 떠올랐고 작은 섬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드라마를 보던 우리 가족의 어색한 모습도 스쳤다. 모두가 지금보다 어리고 서툰 시간을 지나느라 온갖 소음이 집에 난무한 날에도 함께 보던 드라마가 방영될 시간이 되면 우리 가족은 모두 거실에 모였었다. 



그땐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 느낌이 있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각자 감상평을 늘어놨다. 우리는 사극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취향에 맞춰 중국 드라마를 보다 엄마 역시 역사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평소엔 반찬투정을 하는 아빠가 그럴 때면 또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남자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또 대학 캠퍼스가 나오는 드라마를 볼 때면 주인공에 몰입되어 이미 지나간 학창 시절에 대한 말을 한마디씩 내뱉는 우리가 있었다. 그땐 그랬지 하는 말도 뒤따랐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만 어색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시간이 즐거웠고 함께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그 시간들이 못내 행복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도 모르는 기억이 내 꿈에 재료가 된 거 같았다. 거대한 불행 속에 갇힌 것 같은 인생에도 몇 안 되는 색깔 모래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그래서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내게 그런 추억을 준 것처럼 모든 가족들이 함께 모여 대화할 수 있는 그런 드라마를 쓰고 싶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온 가족이 하나가 되는 모습들도 보고 싶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소중함을 회복하고 진짜 아군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말이다. 각자의 이유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내가 쓴 드라마를 보고 엄마와 아빠에게 한 통의 전화라도 먼저 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가족끼리 한 곳에 모여 웃고 떠들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만들고 싶었다. 모두의 생각이 밖이 아니라 안을 향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감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타인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 있는 누군가라는 걸. 너무 익숙해서 가끔은 잊고 함부로 대하기도 했던 한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 이 모든 걸 하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꿈을 품었다. 이왕이면 내 품에서 오래 품어 잘 자랄 수 있게 꿈을 키우고 싶었다. 그러면 누군가가 이런 날 보고 올바른 꿈의 예라고 생각할 수 있는 본이 되고 싶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그럴 수 있을까 생각만 하는 바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거창하게 품은 꿈과 달리 현실은 한없이 초라했다. 대학을 막 졸업한 후라 한없이 궁핍해진 주머니 사정은 누구에게 말하기도 민망할 수준이었고 그때도 우리 집은 계속 내리막 길 위에 있었다. 혹시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 가. 분주한 일상에 치여 바쁘게 바쁘게 만 중얼거리다 이쯤이면 그래도 좀 나아졌겠지 싶어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을 때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현실을 보고 조용히 무너져버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는가. 솔직히 나는 그런 적이 너무 많았다. 이때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또 이쯤 되면 긍정의 힘이라는 말에도 화가 나기 시작한다. 누군가 위로랍시고 그런 말을 해도 눈을 흘기는 나를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그랬다.



그렇게 펜을 잡았다. 물론 처음부터 드라마를 쓴 건 아니다. 나는 드라마를 쓰는 방법도 몰랐지만 무엇보다 단번에 원하는 길로 뛰어갈 용기가 부족했다. 그래서 소설로 눈을 돌렸다. 느리더라도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나답게 거북이처럼 레이스를 시작하고 싶었다. 모두가 토끼처럼 레일을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땅에 고개를 푹 처박고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완주할 생각을 했다. 나는 그렇게 시작하길 원했다. 


나는 작가와 대장장이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한 자루의 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쉴 새 없이 달군 쇠를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 천하에 다시없을 명검이 언젠간 탄생하겠지 하는 호기로운 마음은 망치를 집어든 순간에 눈 녹듯 사라진다. 망치가 움직일 때마다 정신없이 불꽃이 튀고 굳은살이 잔뜩 벤 손바닥은 이제 아무 감각이 없다. 새카맣게 탄 손등은 나도 모르는 새 온갖 흉터 범벅이 됐다. 매일매일이 똑같은 작업에 연속이다. 간섭도 없지만 도움도 없다. 모든 것을 오롯이 나 혼자 해 나가야 한다. 시뻘겋게 달군 쇠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내려치고 차가운 물에 담그는 작업을 계속한다. 언젠가는 칼끝을 대기만 해도 무가 썰리는 칼을 만들리라 결심하면서. 오늘도 망치를 높이 치켜든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매일 같이 노트북을 켜고 책상에 앉았다. 그렇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망치질을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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