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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 Oct 05. 2024

07. Wailing Wall.

시즌1

예루살렘에 통곡의 벽이라는 벽이 있다.



원래 예루살렘 서쪽 성전에 있는 벽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오늘 내가 말하는 벽은 예루살렘에 있는 거대한 성전의 벽을 말하는 게 아니다. 






글을 쓰기로 하고 부엌 옆 작은 방에서 노트북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이 방에서 꼬박 삼 년 동안 글을 썼다. 그렇다고 방 밖에도 나오지 않고 살던 히키코모리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나는 정말 클래식한 사람이라 규칙적인 생활패턴이 있다. 이건 특별한 의지가 있어서 만든 패턴은 아니다. (회사를 다녀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요즘엔 그때보다 더하지만 그 시절에도 새벽에 눈을 떴고 아침이면 천가방을 들고 도서관에 출근을 했다. 하필 동네 도서관은 산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 유난스러운 경사를 자랑했고 나는 눈이 내리면 내리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느리게 걸어 도서관을 향했다.



특별한 위치에 있는 도서관 탓에 한 번에 한 권씩 책을 빌리는 대신 매번 대여섯 권 넘게 책을 빌려 산을 내려왔다. 그렇게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를 두고 꾸준히 나타나자 나를 눈여겨보는 직원들도 생긴 거 같았다. 당연히 요즘 기준으로 또 우리 동네 기준으로 이상할만하다. (물론 내 입장에선 아니다.) 우리 동네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이거나 방학을 맞아 부모님과 찾아온 어린이들이거나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그마저도 방학이나 돼야 유동인구라는 게 생긴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끼지 않는 애매한 나이의 여자가 자주 나타나 여러 권의 책을 빌려가는 건 그들 입장에서 특이할 만하다. 그 책들도 너무 다양하고 말이다. 게다가 요즘은 도서관에 간다고 하면 오-하고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로 기이한 시대가 아닌가.




우스갯소리지만 인증받은 이성을 만나고 싶으면 서점으로 가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책을 보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괜찮다는 무언의 인식(?) 같은 게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두께가 서로 다른 하지만 한 번도 얇아 본 적이 없는 책들을 가방에 넣으면 금방 모양이 울퉁불퉁해졌다. 지퍼도 잠그지 않고 그대로 산을 내려오면 날 따라오는 시선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땐 그 많은 양의 책을 사볼만큼의 여력이 없었다. (지금은 내가 힘들어도 꼭 제 값을 주고 사서 본다.) 빌린 책들을 방 한 구석에 놓고 다시 노트북을 폈다. 그렇게 일주일 또 열흘을 쉬지 않고 글을 썼다. 어떤 날은 12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던 적도 있고 또 어떤 날은 8시간 동안 노트북 앞을 떠나지 않았다. 주말과 공휴일이라는 게 아무 의미도 없을 만큼. 이런 날 두고 정말 무식하군요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앞서 말했지만 그때의 나는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책들은 모두 숟가락으로 퍼먹듯이 봤다. 그렇게 봤으니 재미있어서 본 책은 손에 꼽는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책을 보는 것도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즐거움이 생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가 책을 빌리는 날은 매일 글을 쓰는 일상에 쉼표를 찍는 유일한 날이었다. 그런다고 이미 통증이 시작된 손이 나을 리 없겠지만. 오래 아니, 많은 양의 글을 써 본 사람은 누구나 나와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손목에 고질적인 통증이 생겨 오래 아파 본 사람들은 더 잘 알 거라고 본다. 이 통증은 처음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손끝부터 어깨까지 저린 증상이 오고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차갑게 식기도 한다.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날이 많아지고 온 마디가 쑤시면서 손가락을 굽히는 것조차 쉽게 할 수 없다. 그 덕에 나는 보통사람들 보다 무거운 걸 잘 들지 못한다. 그래서 큰 가방을 쓰지 않고 단촐하게 다닌다. 많은 작가들이 손목 아대를 필수품처럼 쓴다지만 나는 아대의 효과조차 보지 못해 파스 마니아가 됐다. 그마저도 자주 붙이면 살이 타버려 잘 붙이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아픈 것보단 나았다. 



해가 떨어지면 계절에 상관없이 집 밖으로 나와 한참을 걸었다. 아픈 손목을 번갈아 주무르기도 하며 아주 오랜 시간 공들여 걸었다. 요즘 들어 특히 많은 사람들이 버스정류장까지 이십여분을 걸어 나간다고 하면 기함을 토하며 얼굴을 굳힌다. 그렇게 먼 거리는 걸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보통 두 가지 반응으로 갈렸다. 자신의 반응이 타인에게 무례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서둘러 나도 걸어야 하는데라고 둘러 말했고 반대로 무례와 솔직함의 경계가 없는 사람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 내가 그런 본인들을 이해 못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 말이다. 아무렴 버스정류장까지 한 시간을 걷든 열 시간을 걷든 그게 뭐 그렇게 대수인가. 등산이 취미인 사람에게 산을 뭐 하러 타나요? 라고 묻는 말만큼 우스꽝스러운 말도 없다. 차라리 산을 타면 건강에 좋은가요? 라든가 산을 타니 즐거운 가요? 라고 묻는 편이 더 낫다.



일부로 멀리 떨어진 마트까지 가 가벼운 장을 보기도 하고 오래 산 동네를 마치 처음 가는 양 살피며 한참 동안 걷는다. 새로 생긴 가게가 있나 공사 중인 길은 없나 하면서 걷기도 한다. 그래야 하루동안 꼬박 쓴 글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처박은 기분이 나아진다.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얼마나 많은 글을 쓰고 버리길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나마 하루 동안 쓴 몇 만자를 지우는 건 좀 낫다. 완성 직전의 책을 처박는 거보다야 아무래도 마음이 덜 구겨진다. 하루동안 아니, 며칠 동안 구겨진 마음을 펴는 일로 걷는 방법을 선택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 나이를 먹어서도 멈출 이유도 그만둘 방법도 찾지 못했다. 내가 걷는 걸 멈춘다는 뜻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하니까 더 그랬다. 



첫 책은 정말 우격다짐으로 출간했다. 내 입장에선 실험적인 면이 가득한 책이었고 햇 병아리 같은 실력을 지독한 마음으로 끌어모아 쓴 마침표였다. 그땐 책을 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벽이자 언덕이었고 내가 보낸 시간들의 인증이라 생각해 더 지독하게 매달렸다. 사실 지나고 보면 어리석은 발악이자 미련한 선택의 결과였지만 그땐 미처 몰랐다. 그리고 이 미련한 선택은 불행하게도 계속 됐다. 왜 앞서 한번 말하지 않았나. 선택의 나비효과라는 걸.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른 책을 다시 계약했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인 불행이 가속됐다. 물론 이 불행은 나 스스로 자초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릴 때 부터 오래 품은 고민이 있었다. 또 글을 쓰다보니 생각지도 못한 고민도 하게 됐다. (이건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자.)그중 오래된 하나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나만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느냐는 거였다. 이건 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틀에 박힌 구도를 외우고 익숙한 색을 칠해 나가는 방법 말고 내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정체성이 담긴 무엇이 절실했다. 그리고 이 고민은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이전에 출간된 두 권의 책들은 모두 그런 정체성을 담기는커녕 유행을 좇기에만 급급했다는 게 나의 결론이었다. 무서운 자책이 시작되고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고민의 자리에 앉았다. 제 자리로 돌아와서 책상 앞에 앉았다. 못자국 하나 없는 하얀 벽은 눈에는 잘 보이지 않고 손을 가져대야만 느껴지는 굴곡이 있었다. 나는 그 굴곡이 있는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노트북을 덮었다.



결국 세 번째 계약을 파기하는데 감사하게도 모든 것을 멈추는 데 불필요한 잡음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스스로 부족함을 너무 잘 알았고 그건 아마 날 담당했던 출판사분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라 생각한다. 이제와 전할 말이 있다면 당시 날 알던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보내고 싶다.




내가 뭐라고 다른 말을 할 수 있겠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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