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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 Oct 12. 2024

09. 침잠.

시즌1

미디어에서 자신의 무명시절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는 배우들을 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함축된 건지 또 감춰진 부분은 얼마나 많을지 짐작하게 된다. 무명의 시절을 길게 보내다 보면 자연스레 궁핍한 시절이 늘어간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나이와 직업의 간격은 계속 벌어진다. 일상에서 말도 안 되는 오해와 눈치를 받을 때도 많고 자신이 누구인지 당당하게 말하지 못할 때가 많아진다. 사람들의 비웃음에 익숙해진다. 꿈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늠할 수 있는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이상한 형태의 삶을 사는 낙오자로 봤다.



예전에 배우 이정은 님이 자신의 과거 얘기를 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담담한 말투로 얼마 전까지 삼겹살집에서 일을 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속에서 나는 숨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나 역시 오랜 시간을 버틴 사람 중에 하나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 안에는 보통의 궤도를 달려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뭐 하러 그래? 라는 똑똑한 의문이 쏟아질만한 일들이 많았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 말이다.


여전히 꿈을 지키는 데 많은 책임이 들어간다고 느낀다. 꿈꾸는 일에도 공짜는 없다.





새로 들어간 가게는 사람도 환경도 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가게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는지 물품에 제대로 된 가격표도 없어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크고 작은 모든 물건들의 가격을 외우며 물건을 팔았다. 그마저도 첫날부터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며 계산기를 두드렸다. 사실 그곳에서 겪은 일 중 이런 건 별스러운 일 축에도 끼지 않는다. 그래도 꿋꿋하게 가게에 나갔다. 모든 걸 잊고 제로가 되고 싶었다.  



일부로 책은커녕 도서관조차 가지 않았다. 그저 해가 뜨면 가게에 나가 문을 열고 까만 밤이 되면 가게 문을 닫았다.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 어느새 직원처럼 늘어났다. 가게는 여러 사람이 복잡하게 얽힌 이상한 장소인 거 같았다. 여러 가지 경험이 축적되면서 가끔 드는 생각은 직업에 귀천을 만드는 건 직업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아닐까. 삶이 드라마가 아닌 건 이런 곳에서도 꼭 티가 났다. 원래 현실은 더 가혹하고 열악하다. 부당한 것들을 꿋꿋하게 참아 주면 그게 꼭 당연한 줄 알고 끝에 끝까지 달려가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는 뜻이다. 불행은 행복과 달리 기를 쓰고 만들지 않아도 잘만 불어났다.



솔직히 말하면 그만두고 싶은 순간은 참 많았다. 나이 많은 아르바이트 생이 되면 기이한 대접을 받아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일상의 잡음들은 사소한 것들로 치부했다. 푼돈이라도 엄마에게 쥐어줄 수 있다는 게 좋기도 했고 말이다. 일 년이 넘게 가게를 지키자 서서히 글에 대한 생각이 사라져 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두드리던 키보드는 쳐다보지도 않게 됐고 새로운 책이 나와도 일부로 고개를 돌리는 시늉을 하지 않게 됐다. 겉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나는 제법 꿈과 분리된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신문 한 장을 내밀었다. 내 꿈에 유일한 지지자인 엄마는 평소처럼 종이신문을 보다 귀퉁이에 놓인 공모전을 보고 날 불렀다.



우리 집은 아직도 종이신문을 구독한다. 나는 엄마가 내민 신문을 들고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았다. 이름 없는 회사에서 이벤트로 진행한 공모전이었는데 이상하게 계속 눈이 갔다.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 신문을 쳐다봤다. 그리고 무슨 운명이라도 만난 것처럼 노트북을 켜고 공모전을 검색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다음날 아침엔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질 거 같은 기분으로 가게에 갔고 일을 하면서도 줄곧 공모전이 맴돌았다. 마음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격렬하게 충돌하다 흩어졌고 멍하니 책상 모서리만 쳐다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손님이 몰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진심으로 일하지 못했다. 마음이 자꾸 소란했다. 생각만 해도 유난스럽게 사방이 흔들렸다. 이쯤 되자 시간이 지났어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지금이라면 전혀 다른 글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기대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결국 용기를 내 노트북을 켰다. 한참을 망설이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니 어찌나 위화감이 들던지 기름이 말라 뻑뻑하게 굳어버린 톱니바퀴 속에 있는 거처럼 느껴졌다. 분명 방금 전까지 손을 씻고 물건을 만지며 갈아입은 옷을 옷걸이에 걸었는데 그땐 아무렇지도 않던 손가락이 지금은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릴 거 같았다. 낯선 감정에 괜히 손을 들어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렇게 한숨까지 푹 쉬다 한 글자씩 써 내려가며 짧은 단편을 하나 완성하고 공모전에 제출했다. 겨우 커서만 움직였을 뿐인데 구역질이 날 거 같았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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