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하자 시간이 묘하게 붕 떴다.
여느 때와 같이 살고 싶었지만 기묘한 공기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듯했다. 눈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나만 온몸에 불이 붙은 거 같았다. 한동안 집 근처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다. 자동차 타이어가 녹는다는 불볕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 날은 아침에 또 어느 날은 저녁에 사람이 적은 운동장을 계속 돌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잘 걸었다. 꼭 걷는 걸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처럼 아주 어린 날부터 빠르게 걸음을 놀리며 걷는 이상한 마라토너였다.
이 날씨에 누가 걸어?라는 말도 콧등으로 흘리고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아마 그런 나를 멀리서 본 사람들은 꽤나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내 가슴에 불이 붙은 지도 모르고.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끝없이 잘 될 거야만 되뇌는 게 얼마나 목마른 일인지 정말 모른다. 의아한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나는 계속 걸었다. 아니, 걸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차라리 운동을 하면 기분전환에 도움이 된대라고 말했다. 내가 매일 하루에 네 시간씩 걷는 사람인 줄도 모르고.
그러고 보면 난 뭘 해도 티가 잘 안나는 사람이다. 정말 죽을 거 같이 아파야 아픈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날도 평범한 날이었다. 일부로 기분전환을 하겠답시고 아침부터 친구의 회사 근처로 가 스타벅스에서 진한 커피를 마셨다.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고 괜히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장을 보러 마트에 가겠다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는데 흥겨운 듯 콧노래를 부르며 오래된 중고차의 핸들을 붙잡았다. 그랬으면 끝까지 신경 썼어야지. 찰나의 실수가 이렇게 무섭다.
눈 깜짝할 새 사고가 나고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순간이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죽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죽을 때는 아니었던지 주마등이 스치진 않더라. 사지는 멀쩡했어도 온몸이 진탕 나는 게 이런 건가 싶을 만큼 계속 아팠다. 이때도 티가 나질 않았는지 알아서 나이롱환자로 보더라. 이쯤 되면 사실 서운하지도 않다. 음담패설이 주특기가 된 아주머니들과 함께 입원을 하자 첫날부터 어찌나 버라이어티 하던지 간호사도 모르게 내 자리가 바뀐 걸 보고 황당했던 추억도 있다. 유난스럽고 번잡한 걸 싫어하는 나로서는 간신히 잠잠해진 두통이 살아나는 고된 시간이었다. 퇴원하는 순간까지 신경이 곤두선 뒤로 입원은 3인실까지가 마지노선이 됐다.
퇴원을 하고도 한참을 아팠다. 통증이 얼마나 유난스럽던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시간이 훌훌 날아갔다. 이쯤 되니까 사람이 알아서 무기력해졌다. 친구는 그런 날 안타까워했지만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잘 알았다. 앞서 말했지만 이때부터는 정말 시간도 몸도 흐물흐물하게 녹았다.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이 포기라는 걸 하게 된다. 한없이 무기력해진다. 그래도 반복이다. 답이 없는 노력은 하고 싶지 않지만 시간은 계속 흐른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밤이 잦아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원인을 찾는 건 셀 수 없이 많이 해봤다. 밤이 엉망이 되니 낮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되는데 바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생각에 너무 젖어서 경주마처럼 오직 앞만 보고 달린다.
이때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이 막히고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나는 변화가 필요하다. 아니면 명확하고 확실한 길이 필요하다. 단번에 아! 하고 달려들만한 게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렇게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사이 우리 집은 새로운 이사를 준비했다. 자그마치 열두 번째 하는 이사는 그래도 이전보단 나은 구석이 있었다. 우선 정신없이 오래되고 낡은 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는 점과 더 이상 음주운전이 습관이 된 아저씨와 이웃사촌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가장 훌륭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술에 취해 자신에게 술 취했냐고 묻는 사람한테 삿대질을 해가며 고성을 지르던 모습을 기억한다. 누구든 멀리서 라도 한번 보면 안다. 창피를 모르는 사람을 억지로 봐야 하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그리고 그런 현실이 반복될 때 어떤 생각이 드는 지를.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은 넝마가 된 몸을 하고 이사를 했다. 솔직히 고된 이사가 반갑기까지 했다. 사실 내가 아픈 게 집 탓은 아니지만 그땐 뭐라도 변화가 필요했다. 살다 보면 당장이라도 앓아누울 거 같은 몸을 하고라도 어디든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이번 이동이 반갑기까지 했다. 새로운 집에 가 혼자 대청소를 하고 낡고 금이 간 베란다와 아담한 욕실 구석구석에 하얀 실리콘을 발랐다. 발을 디딜 가구가 없어 깨금발을 한 채 찬장까지 전부 닦고 하수구까지 소독한 후 모든 창문을 열었다. 싸늘한 가을바람이 몰아치는 공간에 앉아있노라니 뜬금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때의 내가 어떤 감정으로 울었는지는 솔직히 지금도 모르겠다. 그저 감사했노라고 기억한다. 그리고 하나 둘 쓴 지 삼십 년이 넘은 가구들이 집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낯선 공간이 다시 익숙하게 바뀌는 걸 느꼈다. 사람처럼 나이를 먹은 가구들은 어느 순간부터 오래된 가구를 넘어서 정체성을 가진다. 엄마가 시집올 때 들인 열두 자 자개농도 화장대도 커다란 적갈색 통원목을 잘라 만든 서랍장도 그렇다. 그래봤자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은 늘 이 정도면 버리셔야 돼요 라는 말을 하겠지만.
이사를 마치고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몸살이 났다. 도시가스를 신청하는 게 늦어 저녁식사는 집 근처 옛날 통닭집에서 구운 통닭을 사다 먹었다. 지나치게 짜게 간이 된 통닭을 으적으적 씹다 엄마는 거실에 눕고 나는 방에 가 누웠다. 한 입 가득 베어 문 닭고기가 가죽처럼 기묘한 맛을 냈지만 모르는 척 삼킨 뒤였다. 삼일 내내 환기를 시킨 집안은 싸늘한 바람 냄새가 났다. 다음날 엄마는 가벼운 몸살을 앓았고 나는 삼일 내내 고열에 시달렸다. 이 날의 아픔도 꽤 오래 기억했다. 온몸에 구멍이 난 것 같았던 시간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집 근처에 긴 산책로가 있었다. 집 앞에서 길이 끝나는 곳까지 쉬지 않고 걸으면 한 시간이 넘을지도 모르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아름드리나무가 길게 우거졌고 계절의 변화를 알리듯 쉴 새 없이 낙엽이 떨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그 길을 오래 걸었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