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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 Sep 28. 2024

03. 스물, 스물넷

시즌1

앞선 글에서 짧게나마 나의 대학시절에 대해 말했었다. 그러나 부족한 점이 많아 따로 페이지를 마련했다. 대학시절에 대해 말하기 앞서 내가 어떻게 대학을 갔는 가에 대해 말하려 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많은 걸 배웠다고 할 만큼 오랜 시간 학원에 머물렀다. 중학생 때 입시 미술을 시작하면서 나는 혼자 입시생활을 감당했다. (이유는 알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돈을 벌어서 학원을 다녔다는 말은 아니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크면 부모가 최선을 다해도 한계가 명확하다는 뜻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었던 나는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다행히 나쁘지 않은 재능이 있었고 나 또한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타고난 성격상 한번 시작하기가 어렵지 시작하고 나면 끝까지 가는 터라 그림에 무섭게 매달렸다. 처음엔 모두가 그렇듯 질보다 양을 늘리는 걸로 실력을 쌓았다. 타고나길 병약하고 예민하게 태어났어도 목표를 향한 집념만큼은 어느 누구 못지않아 빠르게 실력을 늘릴 수 있었다. 다만,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복이 없었다. 날 가르친 분들이 실력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뒤돌아보니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매일매일이 고된 나날의 연속이었다. 어깨는 돌덩이같이 굳은 지 오래고 면역이 약해 감기몸살을 달고 살았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명절은 한껏 고장 난 몸이 쉬는 날이 됐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까지 다닐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걸 엄마도 몰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그때는 강렬한 내적 사춘기를 보내는 어린아이가 감정을 해소할 창구로 그림을 선택하게 하는 게 그나마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으셨던 거 같다. 달리 다른 답이 있지도 않았고 나는 그런 엄마를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해한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자식을 키우는 일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도 빈틈이 가득하다. 그걸 한 사람의 탓으로만 돌릴 순 없다. 우리는 모두 부족하다. 그런 과정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엄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절친이 됐고 말이다. 어두운 터널을 함께 지낸 사람들은 서로 아름다운 동무가 된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그 당시에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전국에 있는 나름 이름 있는 대학의 대회에 나갔고 가끔은 운 좋게 상을 탄 적도 있다. 100대 1의 경쟁률을 가진 수시전형에 지원하러 종잇장 같은 몸을 끌고 시험을 쳤다. 시험 전날 올라가 대학 근처 사우나에서 자고 아침은 김밥천국에서 대충 때웠다. 그나마 가까운 곳은 새벽공기를 헤치고 시험장 앞에 서서 기다렸다. 한 마리의 경주마가 되는 것이 나의 지독한 성실이자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올인'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시에 실패했다. 이 정도면 하고 쉽게 생각하던 대학까지 떨어지고 나자 정말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전부를 걸었는데 실패할 수 있는 건지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 결과 통보까지 받고 한동안은 멍하니 살았던 거 같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시험날까지 지독하게 아팠다는 건 비밀이지만 나는 그걸 핑계 삼고 싶지 않다. 그냥 내 실력이 모자랐다고 본다. 나는 아프지 않은 날보다 아픈 날이 더 많았기 때문에.


그 후에 당시 날 가르쳤던 선생님을 찾아가 펑펑 운 건 그나마 오래 남은 기억이 됐다. 물론 나만 실패한 건 아니지만 (이 사실을 위안 삼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어째서 인지 내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갈 때,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를 갈 때 유독 하향지원이 많았다. 거의 폭우가 내렸다는 표현이 맞겠다. 도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모두 가고 싶은 대학보다  갈만한 대학에 지원하는 일이 많았다. 그게 내게도 다른 친구들에게도 재난처럼 엄청난 영향을 줬다.  


물론 나처럼 재수를 해야 했던 아이들도 있었다. 나 역시 자연스레 재수를 했고 입시실패의 상처를 추스리기도 전에 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수시로 지원해 들어가게 된다. 그땐 겁을 내고 말 것도 없었다. 그만큼 지쳐있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여유도 없었다. 그나마 집에서 가까운 대학을 지원한 건 그게 가장 돈이 들지 않는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해서였다. 솔직히 지금 와서 내 인생을 돌아보면 가장 후회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대학을 결정해서는 안 됐다.


아무튼 대학에 들어가고 한 학기가 지나자 결국 참다못해 휴학을 하고 일을 시작했다. 차라리 돈을 버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취업이 워낙 암담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온갖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 PC방 주간, 야간은 말할 것도 없고 단기 알바로 전단지나 편의점 땜빵, 밤을 지새우는 택배 물류알바를 나간 적도 있었고 음식점 서빙이나 카페 알바를 한 적도 많았다. 옷가게나 신발가게에서 점원이 되거나 액세서리를 판 적도 있었다. 온갖 일들을 하다 보니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몸은 여전해서 아프면 쉬는 날도 많았고 무식하게 꾹 참다가 탈이 나는 날도 많았다. 한번 열이 오르면 몸무게가 금세 삼 킬로씩 빠지는 기이한 날도 있었고 시도 때도 없는 두통 때문에 타이레놀을 사탕처럼 들고 다녔다.   


그땐 화가 머리끝까지 차 술을 마신 날도 많았다. 남들은 즐겁기 위해 마신다는 술을 나는 취해 시간을 때우기 위해 마셨다.(물론 지금은 술을 먹지 않는다.) 정확하겐 인생의 시간을 때웠다는 말이 정확하다. 새로운 사춘기가, 극심한 열병이 시작된 거 같았다. 억지로 웃고 웃을 거리를 찾는 일이 늘었지만 내 얼굴표정은 점점 무섭게 굳어갔다. 웃음을 원하는 만큼 반대로 울음이 멀어져 갔다. 분명 울어야 하는 순간에도 웃음을 찾는 날이 늘어가자 끝내 울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일을 하는 내내 마음으로 한 사람을 오래 찾았다. 그 무렵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살면서 단 한 번만 좋은 사람을 만났다면 내 앞에 주어진 삶이 무엇이든 그냥 순응하고 살았을 거 같다고. 나는 아직 그 말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은 안다.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말이었는 지도. 지금의 나는 사람을 찾지 않는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려 하지.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냥 나로서 내 자리를 지키려 한다.


마지막 휴학연기를 알리는 문자가 도착했을 때 말없이 휴대폰 메시지를 닫아버렸다. 그때의 나는 도전보다 포기가 편한 패잔병 같았다. 그렇게 내 최종학력은 대학 중퇴가 됐다. 그런데 그게 계속 내 발목을 잡더라. 일 년쯤 지났을까. 정신없이 일을 하다 또 병을 얻어 앓아눕게 됐을 때 우연처럼 엄마와 마주 앉았다. 엄마는 내게 대학교 졸업장을 따라고 권유했다. 난데없는 말이었지만 모처럼 듣는 새로운 말에 희망회로가 돌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그런 환상이 있지 않나. 지독한 현실에서 마법처럼 벗어날 어떤 기회에 대한 갈망이 있지 않냔 말이다. 내게는 엄마의 제안이 꼭 그렇게 들렸다. 그런데 현실은 환상에 젖을 기회를 단 몇 분도 주질 않았다. 머리는 기가 막힌 속도로 현실적인 문제에 나를 대려다 놨다. 예를 들면 무슨 돈이 있어서라던가. 어떻게 다시 대학을 가지?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내 인생이 웃픈 도돌이표 같았다. 솔직히 고백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새로운 대학에 전혀 다른 전공을 지원해 진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건강한 몸으로 돈을 벌 필요도 없는 평범한 학생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현실에 짓눌린 한심하고 용기 없는 사람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결국 나는 학교로 돌아가게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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