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졸업을 앞두고 정말 감사하게도 미국유학 제의를 받았다.
내 꿈이 외국 유학임을 아는 분의 제의였다. 모든 비용을 장학금으로 지원해 줄 테니 한번 떠나보지 않겠냐는 말에 나는 정신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결국 평생 꿈이라고 불려도 좋을 제의 역시 끝끝내 거절했다. 아마 이름 모를 커다란 재단에서 주신 제안이었다면 대번에 박수를 치며 수락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게 유학비용 제의를 한 분은 부자가 아니었고 꽤 오랫동안 모은 자신의 쌈짓돈을 털겠다는 의도였기에 정말 피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없어 본 사람의 마음을 잘 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피와 땀이 묻은 돈을 쥐고 유학길에 오른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꼭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발판으로 삼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이런 날 보고 누군가는 없는 게 더럽게 따진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무리 없어도 따지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땐 그게 최선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감사한 분은 아직도 모르시겠지만 늦은 밤 꿈같은 제의를 거절하고 카페에서 집으로 걷는 1시간 동안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 밤 가슴에 멍이 들도록 오래 울며 걸었다. 그래서일까. 평생 숙원이나 다름없던 꿈이 새카만 갈퀴가 되어 내 가슴을 할퀴고 사라지던 밤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후로 평범하게 졸업하고 취직해 잘 살다가 갑자기 짜라란 마음이 동해서 글을 쓰기로 한 건 아니다. 그랬다면 차라리 좋았을 거다. 오히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이 왔다 갔다 할 만큼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웃프게도 누굴 탓할 것도 아닌 내 운전미숙의 결과지만 그 사고 덕에 나는 꽤 오래 아파야 했다.
그 뒤론 시간이 녹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나의 20대 마지막의 시간은 그렇게 어이없이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물론 그 순간에도 내 머릿속엔 미래에 대한 생각 밖에 없었다는 게 나의 고백이다. 퇴원을 하고 다시 머리를 감싸 쥐는 나날이 계속됐다. 나는 곧 서른이라는 거대한 숫자를 맞이할 스물아홉의 겨울에 있었고 한 해를 보내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려 가는 밤거리를 걸으며 친구에게 고백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나, 작가가 될 거야.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에게 덤덤한 답장이 돌아왔다. 자기 생각보다 조금 더 오래 걸리긴 했지만 너는 그럴 줄 알았다고. 나는 친구의 메시지에 바로 답하진 않았지만 버스에 오르며 혼자 웃고 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뭔가 대단한 산을 하나 넘은 가슴속 어딘가가 그냥 개운했다. 그렇다고 그 뒤로 대단한 일들이 빵빵 터져 나온 건 당연히 아니다. 그냥 나는 꿈을 정한 취준생이자 곧 백수인 아직 스물아홉 흔녀 일 뿐이었으니까.
그 뒤로 고생길이 활짝 열린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꿈을 작가로 정한 건 계속 말하지만 정말 치열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소위 매체나 적성 찾기 프로그램 같은 곳에 늘 나오는 말들이 있지 않은가. 일명 적성 찾는 법이나 내 꿈 찾기 같은. 그런 책이나 기사 또는 인터뷰를 보면 대부분 하는 말이 비슷하다.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라. 내게 가장 익숙한 건 무엇인가. 남보다 내가 잘할 수 있다고 믿는 건 뭔가. 너만 타고난 재능이 있다 같은 말에 아무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게 뭘까. 참 오래 고민했다. 솔직히 돈이 최고라고 돈만 보고 달려들기엔 나는 속물로써도 그리 재능이 있는 편이 아녔다. 멀리서 봐도 마냥 허무해질 결과가 빤히 보였다. 이건 돈이 좋다 나쁘다의 문제와 상관없었다. 그냥 나는 내게 꼭 맞는 꿈을 찾고 싶었고 가진 재능이 있다면 그걸 발견해 쓰며 살고 싶었다. 쉽게 말해 태생이 꿈을 꾸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던 것뿐이다. 그래서 오래 고민했다.
그때 머릿속에 슬그머니 떠오른 단어는 바로 책이었다.
우리 집은 부모님 두 분 다 책을 너무 좋아하는 분들이라 유난히 책이 많아 우리는 늘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얼마나 책이 많았던지 집안형편이 기울자 이사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많이 버린 게 바로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 집에 가장 많은 물건이 바로 책이다.
나는 책이 익숙했다. 그렇다고 글 쓰는 것도 익숙했을까? 그건 또 아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오래 그림을 그린 사람이었고 그림과 글 중 하나만 잘하면 되지 하며 글쓰기 자체를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래도 그냥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고도 기이한 끌림이 나를 노트북 앞으로 끌어당겼다. 성격상 절대 맨땅에 헤딩하는 짓은 하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맨땅에 나를 던지기로 결정한 거였다. 물론 당장 나가는 돈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메리트였다. 내가 곁눈질로 본 작가는 책과 노트북 그리고 엉덩이만 있으면 되는 사람 같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없던 스물아홉, 12월 31일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