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온갖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했지만(대학시절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우리 집은 20년이 넘게 짙은 수렁 같은 가난 속에 있었다. 우리가 가난을 벗 삼게 된 건 IMF가 원인이지만 그걸 20여 년이 넘게 겪다 보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게다가 우리 부모님은 정말 쉬지 않고 노력하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환경을 보는 내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암울했다. 나는 일반적인 과를 졸업한 것도 아니어서 장학금을 받아도 꽤 많은 학자금 대출이 남아있었고 (물론 나중에 감사하게도 잘 해결했다.) 대학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야 할 만큼 돈에 눌리고 치인 상태였기 때문에 서울로 취업을 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저 지방 4년제를 간신히 졸업한 애매하게 가난한 사람일 뿐이었다. 또 신입 월급 180만 원이 기본이라는 업계(?) 특유의 연봉은 듣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물론 우리 업계도 좋은 회사는 분명 있었다. 화려한 간판을 가진 기라성 같은 회사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태어나도 갈 수 없는 곳들이 분명했다. 그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내게 NO라는 낙인이 선명하게 찍히던 그 시간을 기억한다. 수업이 끝난 후 가고 싶은 회사에 대해 슬쩍 말을 꺼내자 교수는 순식간에 명쾌한 해답을 내려줬었다.
너는 안돼. 너는 나이가 많아. 거긴 이미 올해 뽑기로 한 사람이 있어.
나도 솔직히 예상한 결과였다. 가난은 눈치를 키우는데 몹시 훌륭한 재료가 되고 나는 공교롭게도 눈치가 꽤 빠르다. 그걸 일부로 감추고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렇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다른 사람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솔직히 참담했다. 대학을 들어가기 전엔 최소한 대학을 나와야 이력서라도 낼 수 있을 거 같더니 막상 대학을 졸업하자 정육점 한우처럼 등급이 매겨져 갈 수 있는 곳이 제한된다는 게 그냥 서글펐다. 고기로 봐도 나는 특수부위 근처에도 가지 못해 뭉툭하게 썰린 자투리 같았다.
내가 자투리가 된 데엔 몇 가지 사소한 이유도 있었다. 어린 후배들보다 조금 더 많은 나이와 평범한 외모는 이상하게 커다란 흠이 됐다. 어린 날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한 전공은 예쁜 얼굴과 잘 빠진 몸매 아니면 어린 나이가 큰 스펙인 이라 나 같이 키만 큰 흔녀는 고작 몇 살만 많아도 어디 쓰기 곤란해 몹시 애매모호하단 말을 듣기 좋았다. 물론 나 역시 보통의 입장들을 이해한다. 그저 내 마음이 조금 긁혔다는 것 뿐.
거기에 조금 더 하자면 4년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고민하던 취업분야 중 한 곳을 고이 접어버렸을 뿐 그렇다고 깊은 고민이 얕은 고민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내 머릿속은 24시간 쉴 틈 없이 돌아갔고 다른 건 그게 무엇이든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나는 접은 것만 있을 뿐 펼친 건 아무것도 없는 희끄무레한 졸업생이 돼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논 것도 아닌데. 나름 억울했다. 매일같이 도서관에 처박혀 온갖 직업을 검색하고 소위 말하는 직업에 테크트리를 찾아 헤맸다. 어느 때는 그래도 전공 관련으로 어느 쪽은 전공과 전혀 상관없지만 비슷해 보이는 분야로 머리를 사정없이 굴렸다. 워낙 힘들게 지냈기 때문에 적어도 사람대접을 받는 회사에 들어가는 게 나름의 목표였다. 그래서 쉴 수가 없었다. 다른 분야의 전문서적을 읽기도 하고 취업에 기본이 되는 자격증은 없는 돈과 시간을 쪼개서 꾸역꾸역 땄다. 이력서 쓰는 법과 자소서 쓰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 일부로 기초 글쓰기 교양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러자 당시 수업을 담당했던 타과 교수는
내 수업에 들어온 미대 학생은 자네가 처음이야.
라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특이한 미대생이 되어갔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력서 빈칸을 채우려 억지로 전공과 관련된 예술대전에도 많이 나갔다. 그렇다고 큰 상을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원래 상욕심이 큰 사람도 아니고 내 재능은 원 없이 빛나기엔 몹시 미천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이력서에 쓸 수 있는 한 줄의 수상경력뿐이었다. 대회에 나가고 간간이 자격증을 따는데도 은근히 큰돈이 들었다. 누구는 그게 큰돈이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한텐 정말 목돈이라 부를 만했다. 부모님 집에 있었어도 한 달 생활비를 15만 원으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15만 원에는 식비와 교통비가 모두 포함됐단 뜻이다. 또 미대의 수업은 일반 학과 수업처럼 이론 두 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통 실기 네 시간, 다섯 시간을 듣고 관련 과제는 수업마다 별도다. 학교에서 밤을 새우는 일도 종종 있고 거기에 이론수업은 양념처럼 애매하게 따라다닌다. 물론 전공만 하는 말이다. 우리는 교양수업도 들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나는 좋은 학점을 받아야 할 수업과 그렇지 않아도 될 수업을 구분했다. 나의 모든 에너지를 학점 받기에 쓰기엔 남은 것도 충전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남는 모든 시간을 아르바이트를 하는 데 썼다.
그건 방학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야 다음 한 한기가 살아졌다. 매 학기마다 내 가방 속엔 당시 600원이던 레쓰비와 유통기한이 당일 마감인 삼각김밥이 늘 굴러다녔다. 커피와 삼각김밥이 주식이 된 건 이것들이 저렴해서도 있지만 사실 밥을 먹으러 다른 곳을 돌아다닐 시간이 없어서가 더 컸다. 늘 모든 강의시간을 꽉꽉 채우며 건물사이를 마구 달렸으니 쉬는 시간이라곤 수업이 시작하기 전인 10분과 끝난 10분이 전부였다. 어떤 날은 같은 교수의 교양수업을 연달아 신청한 통에 교수와 단둘이 강의실에 남아 있던 적도 있었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삼각김밥을 먹고 교수는 자기의 자리에 앉아 수업시간을 기다렸다.
그래서 인지 나는 지금도 밥을 천천히 먹는 법을 모른다.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았으니까. 그런 4년이었다.
그러니 나름 삶에도 취업에도 필사적이었단 뜻이다. 어떻게 머리를 굴려도 내가 서울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그냥 한번 해보지 같은 말만큼 부담스러운 말이 또 있을까. 나는 그냥이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맨땅에 한번 헤딩해 보자는 말도 포함해서 모두 불편한 마음이 드는 말이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