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아이가 다섯 살 즈음의 이야기다. "엄마 저 사람은 왜 이렇게 뚱뚱해?" 좁은 엘리베이터 안이었고 저 사람은 내 앞에 있었다. 소화기가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화끈거리는 얼굴에 불부터 끄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아이의 저 솔직한 입에는 눈칫밥을 먹여주고 싶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거리낌 없이 순수하고 진솔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던 것은 맞지만 이런 식의 솔직함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이에게 착한 거짓말과 때와 장소를 가리는 솔직함에 관하여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잘 모르는 눈치다.
돌이켜보니 감정에 솔직한 것도 나를 닮은 것 같다. 나는 싫은 내색을 숨기지 못해 감정에 늘 솔직한 편이다. 특히 남편에게는 더욱 그렇다. 신혼 초 한동안은 에둘러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었지만 자꾸만 에러가 나는 남편의 공감버튼은 자꾸만 나의 감정선을 고장 나게 만들었다. 그 후로 남편과의 대화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연애시절 나는 남편의 웃는 모습이 좋았다. 웃는 모습 한 가지가 나머지 모든 것들을 덮어버리는 순간들이었다. 그때도 남편과의 대화 코드는 평양냉면 같았지만 단지 함께 있는 시간들이 좋았기 때문에 대화에 중요성을 미처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만나서 영화를 보거나 산책을 하거나, 즐거운 것들을 함께 누리는 시간에 만족할 뿐이었다. 그리고 가끔씩 서운한 일이 생기면 남편이 늘 먼저 사과하는 편이었고, 깊은 대화가 필요한 날에는 주로 친구나 동료들이 함께했었다. 그래서 정작 연애시절에는 대화의 갈증을 남편에게까지 느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주 대단한 실수였던 것이다. 평생 친구나 동료들이랑 사는 것도 아닌데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시원한 대화 한 잔을 아주 꿀꺽꿀꺽 마시고 싶어 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편은 여전히 사과에는 1등인 1초 쏘리맨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이쪽에 불이 났는데 저쪽에 물을 뿌려대서 탈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사이 결혼생활은 10년 차가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나는 점점 더 감정표현에 솔직해져 갔다. 남편은 늘 혼나는 일이 많았고 나는 대부분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일까? 아이는 요즘 작은 실수에도 ‘엄마한테 혼나면 어떡하지?’라는 말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문득 방금도 혼이 났던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 앞에서는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언제나 들장미 소녀 캔디가 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인내심이 부족한엄마는 감정에만 솔직하고 참을성이 없었다.
어렸을 때에는 잘못한 일이 생기면 어른들이 항상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 줄게'라고 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솔직함 뒤에는 언제나 어려움이 따랐고 불편해지는 일들이 계속됐다. 내가 솔직해지면 상대방의 마음이 상하고 상대방이 솔직해지면 내 기분도 상하는일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부정적 감정에는 매번 솔직했지만 긍정적인 감정에는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아이에게만큼은 매일같이 사랑한다고 속삭여줬던 거 같은데 엄마에게 혼이 날까 움츠러드는 아이의 모습을보고 나니 그동안 남편에게 퍼부은 솔직함들이 후회스러웠다. 착한 거짓말과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솔직함은 아이보다 내가 먼저 배워야 할 덕목 같았다.
나는 오늘부터 부정의 말보다 긍정의 말에 솔직한 엄마가 되기로 다짐했다. 일단 오늘 저녁부터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로 남편의 퇴근길을 맞이해주어야겠다. 수... 수.. 고했어 오늘도... 벌써부터 온몸에 닭살이 돋아난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